1914년 제1차세계대전은 ‘슐리펜 계획’에 따른 ‘8월의 포성’으로 시작됐다. 기원전 216년 로마군을 포위 섬멸한 한니발의 칸나에 전투를 떠올린 독일 참모총장 알프레트 폰 슐리펜이 입안한 계획은 두 전선 중 서쪽 프랑스를 조기 제압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프랑스를 꺾은 후 동쪽의 러시아를 공격한다는 계산이었다. 여기엔 러시아의 움직임이 더딜 것이란 판단이 깔려 있었다.
막상 뚜껑을 여니 러시아군은 독일의 예상보다 빨리 동쪽으로 밀고 들어왔다. 다급해진 독일은 서부전선에서 일부 병력을 빼내 이동시켰지만 결과적으로 그럴 필요까진 없었다. 현역으로 복귀한 퇴역장군 파울 폰 힌덴부르크(당시 67세)가 탄넨베르크에서 대승을 거뒀기 때문이다. 일약 영웅으로 떠오른 힌덴부르크는 참모총장이 됐고, 전후 바이마르공화국 대통령에도 선출됐다.
힌덴부르크의 전기가 여기까지라면 그는 지금도 영웅 대접을 받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말년에 히틀러를 총리에 임명해 나치 정권 탄생의 문을 열어줬다는 씻을 수 없는 오명을 뒤집어쓴 채 독일 마르부르크의 한 성당에 잠들어 있다.
머리 아픈 지도자들
책 ‘세계사를 바꾼 21인의 위험한 뇌’는 이 역사적 사실의 이면을 들려준다. 일본 국립병원기구 스즈카병원 명예원장이자 신경과 전문의인 고나가야 마사아키가 책을 썼다. 저자는 힌덴부르크가 말년에 ‘노인성 치매’를 앓았을 가능성이 크고, 그것이 인류 역사상 최악의 인물이 등장하는 하나의 이유가 됐다고 설명한다.
책에는 힌덴부르크의 병을 확인시켜줄 일화가 여럿 등장한다. 차에서 내린 그에게 장교가 군모를 씌워주자 갑자기 태엽을 감아 움직이는 병정 인형처럼 열병을 했다거나 한 번씩 발작을 일으킨 후 의식을 잃은 적이 있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가 1933년 1월 히틀러를 총리에 임명한 당일 밤 나치 돌격대 행진을 보고선 “어이, 루덴도르프(탄넨베르크 전투 당시 참모장) 자네 부하가 멋지게 행진하는구먼. 근데, 저 포로들은 다 뭔가?”라고 한 것도 판단력이 온전치 않음을 드러낸다. 제1차세계대전과 현실이 뒤섞인 것이다.
지도자의 병세는 소문으로 퍼졌다. ‘대통령은 비서실장이 내미는 서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서명하고, 먹다 남긴 샌드위치 포장지에도 서명한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저자는 기록을 근거로 힌덴부르크가 서서히 치매가 전개되는 알츠하이머병을 앓았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뇌 혈류 부전으로 인한 혈관치매 가능성도 있다고 진단한다. 온전치 않은 그를 둘러싼 것은 측근 ‘삼인방’이었다. 제1차세계대전에 상병으로 참전했던 히틀러를 ‘보헤미아 상병’이라고 부르며 멸시했던 힌덴부르크였지만 측근들은 그를 구워삶아 히틀러에게 날개를 달아줬다.
책에는 힌덴부르크 외에 머리가 아팠던 지도자들이 더 등장한다.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고혈압 뇌출혈로 임기 중 사망한 것을 비롯해 중국의 마오쩌둥은 근위축성측삭경화증(루게릭병), 소련 브레즈네프는 혈관 치매를 앓았거나 앓았을 가능성이 높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힌덴부르크의 뒤를 이은 히틀러도 파킨슨병을 앓았던 것으로 추정됐다. 저자는 이들의 병도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데 큰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본다.
그중 루스벨트는 전후 처리를 다룬 1945년 얄타회담 당시 혈압이 300/170㎜Hg를 찍을 정도로 쇠약해져 있었다. 회담 결과가 소련으로 기울어진 것은 그의 건강 악화가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오는 건 이 때문이다. 회담에 참가한 윈스턴 처칠 주치의의 회고록도 이를 뒷받침한다. “루스벨트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앉아 있기만 할 뿐 토론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그가 과연 이 중요한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기록이 드문 먼 역사 속 인물에 대한 진단도 있다. 저자는 로마제국을 위기에 빠뜨린 군인황제 시대를 연 막시미누스 트락스 황제가 뇌하수체 거인증과 말단비대증을 앓았다고 확신한다. 황제의 키가 260㎝였다는 기록, 하루 와인 26ℓ와 고기 13.5~18㎏ 먹었다는 기록, 황후의 팔찌를 반지처럼 꼈다는 일화 등이 진단의 근거다. 키가 크고 손가락이 굵은 것은 거인증과 말단비대증의 증상이고, 와인을 많이 마신 것은 거인증과 말단비대증의 합병증이 당뇨병인 것과 무관치 않다고 설명한다. 황제 얼굴이 새겨진 동전에서 눈썹 부분이 돌출되고 아래턱이 다부지게 발달한 것도 거인증을 앓는 사람의 생김새로 파악한다.
인물들을 통해 본 뇌질환
병을 앓았던 인물의 이야기와 함께 병에 관한 지식도 확인할 수 있다.
그 중 미국 남북전쟁의 북군 사령관 율리시스 심프슨 그랜트의 이야기는 편두통의 기분 변화 증상을 설명한다. 적군을 많이 죽여 ‘도살업자 그랜트(Butcher Grant)’라는 별명까지 붙었던 그는 남군 사령관 로버트 리가 항복한 후 더 없는 관용을 베푼다. 저자는 이를 평소 그랜트가 앓았던 끔찍한 편두통과 연결 짓는다. 저자에 따르면 편두통은 통증이 사라진 후 하늘을 나는 듯 들뜨기도 하고 비몽사몽 혼미하거나 우울한 기분에 휩싸일 정도로 감정이 널뛰듯 오르내린다. 그런데 그랜트가 리의 항복 문서를 받은 후 통증이 사라졌다는 기록이 그의 일기에 있다. 통증이 사라진 후 회담에 나선 그랜트가 편두통에 따른 기분 변화 증상의 영향을 받아 관대한 결정을 내렸을 거란 추정이다.
암살 미수 사건 이후 히틀러의 모습도 파킨슨병의 특징을 보여주는 사례다. 1944년 7월 암살 미수 사건 이후 히틀러는 “이번 일격으로 내 신경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고 주위에 이야기했다. 그런데 파킨슨병을 앓던 이가 격렬한 정신적 흥분을 느끼는 상황에서 순간적으로 민첩해지는 사례가 보고돼 있다.
화재 현장에서 파킨슨병 환자가 엄청난 속도로 피신하거나 고베 지진이 일어났던 일본에서 병원 환자의 20%가 증상이 개선된 것이다. 본인 의사와 무관하게 팔다리를 불규칙하게 움직이는 무도병(舞蹈病·헌팅턴병)을 앓았던 포크송 가수 우디 거스리를 다룬 장에선 이 병을 마녀사냥과 관련짓는다. 마녀사냥이 심심치 않게 일어났던 영국의 한 마을 후손 중 같은 병을 앓는 이들이 있었던 것에서 병의 증상이 마녀로 여겨지는 빌미가 됐을 거란 분석이다.
책은 이처럼 과거 유명인들의 뇌 질환과 이를 둘러싼 역사적 사실을 알기 쉽게 전달한다. 저자가 후기에서 말했듯 일반 독자가 이해하기 쉽도록 뇌 질환을 설명하려는 목적에 충실한 책이다. 단 역사적 사실을 질환을 중심으로 풀어내다 보니 다른 변수나 상황 등에 대한 균형 감각은 필요해 보인다. 일례로 그랜트의 관용을 편두통 이후의 기분 변화로만 보는 것은 그가 대통령이 된 후 보인 일관된 행동을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다.
김현길 기자 h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