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던 미국 출신 영국 시인 TS 엘리엇의 대표적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는 433행의 장시(長詩) ‘황무지’는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엘리엇이 말하는 4월과 잔인한 이유는 다를지라도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4월은 잔인한 달입니다. 왜냐하면 4월 3일은 제주항쟁의 날이며, 16일은 세월호 사건이 있던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 두 사건이 잔인한 이유는 아직도 미해결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시편을 읽다 보면 시인은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를 늘 노래합니다. 예언자들도 하나님을 ‘공평과 정의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삶 가운데 ‘과연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는 정말 있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의인은 고통받지만 악인은 오히려 더 잘 살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면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일지라도 ‘정말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이신가’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도 혼란스러운 때가 있었습니다. 바로 하박국 선지자가 활동했던 시절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온갖 불의로 가득했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언제까지 이 불의에 침묵하고 계실 것입니까”라며 간구하지만 하나님은 하박국의 절규에 대해 침묵하셨습니다. 더구나 이 항변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하박국 선지자를 더욱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보다 더 패역한 바벨론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에서 일어나는 불의를 심판하시겠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악으로 악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이 말씀을 들었을 때 기가 찼을 것입니다. ‘불의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려면 공정과 정의를 사용하셔야지, 어떻게 이스라엘보다 더 악한 바벨론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심판한다는 말일까.’ 이는 하박국 선지자뿐 아니라 우리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인듯합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생각하고 그가 하나님께 요구하는 정의의 기준은 무엇일까. 혹시 그것은 하박국 선지자 본인이 세운 정의는 아니었을까요. 즉 불의한 이스라엘보다 바벨론이 더 악하다는 하박국의 기준은 남유다만의 기준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인간은 정의에 관한 절대적 기준을 세울 수 없는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늘 진영 논리에 빠질 위험이 있는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정의를 세우기 위해 분연히 일어났던 수많은 세상 권력이 마침내 자신 또한 부패해졌던 인간의 역사가 이를 증명합니다. 종교개혁을 통해 탄생한 개신교회들이 이제는 개혁의 대상이 돼버린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인간의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우리의 방식으로, 우리만의 정의를 세우려고 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다수나 권력을 가진 자들의 방식으로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를 세우실 때까지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박국 선지자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영원할 줄 알았던 바벨론 페르시아 로마제국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역사 속의 해결되지 못한 불의에 대해 낙심하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때를 우리 믿음으로 기다리며 인내해야 합니다.
오세조 목사(팔복루터교회)
◇팔복루터교회는 미국 미주리주 시노드가 한국에 루터교 선교를 시작한 지 40주년이 되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루터대 내에 세운 ‘루터교 한국 선교 40주년 기념교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