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에도 색깔이 있다면 지금은 녹색일 듯하다. 그만큼 금융권에 부는 녹색 바람이 거세다는 말이다. 정책금융기관뿐 아니라 거의 모든 민간 금융사들이 앞다퉈 녹색금융 비전을 내놓고 녹색 이름표를 단 각종 상품을 내놓고 있다. 신재생에너지 개발, 온실가스 감축 기술 등에는 문을 넓혀 자금을 제공하고, 환경 훼손 우려가 큰 업종에 대해서는 금융 지원을 중단하겠다는 기류가 갈수록 대세로 자리 잡고 있다. 같은 선상에서 금융권의 ‘탈석탄’ ‘탄소중립’ 선언도 줄을 잇는다.
다만 환경과 경제의 선순환을 위한 녹색금융으로의 길은 이제 막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단계다. 정부 차원의 동참 독려에 금융권이 보조를 맞춰 ‘액션’을 취하는 성격도 있다.
왜 녹색금융일까
금융과 환경은 서로 상충되거나 별다른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이기 쉽다. 그러나 기업의 환경·사회·지배구조(ESG) 책임성이 부각되고, 기업의 친환경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자본’ 역시 녹색산업 성장을 뒷받침하고 유도하는 쪽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는 압박이 강해지고 있다.
금융회사 입장에서도 자금 운영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환경문제를 상수에 둘 수밖에 없게 됐다. 기후변화에 따른 태풍과 홍수, 대형 산불 같은 자연재해가 금융·부동산 자산 가치에 영향을 미치고, 금융 시스템에 예측 불가능한 충격을 가할 수 있기 때문에 대비가 필요한 것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도 기후변화가 금융안정에 미칠 잠재적 위험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지난달 2개의 위원회를 신설했다. 레이얼 브레이너드 연준 이사는 비영리 환경단체가 주최한 콘퍼런스에서 기후변화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도화선이 된 리먼브러더스 파산 사태와 맞먹는 위협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우리나라도 지난해 8월 금융위원회와 환경부, 금융권, 유엔환경계획 금융이니셔티브(UNEP FI) 등이 참여하는 녹색금융 추진 태스크포스(TF)를 가동했다. 녹색금융 TF는 지난 1월 열린 3차 전체회의에서 올해 녹색금융 추진 계획을 확정했는데, 이에 따라 모든 금융사는 ‘녹색금융 모범규준’ 내규를 만들고 전담 조직을 마련해야 한다. 올해부터 녹색금융 리스크 관리 및 공시 의무도 생긴다.
국내 금융기관 113곳은 지난달 9일 ‘2050 탄소중립’ 달성을 위한 기후금융 지지 선언에도 동참했다. 이들은 선언문에서 “자본이 고탄소산업에서 저탄소, 궁극적으로 탈탄소산업에 대규모로, 빠른 속도로 유입돼야 실질적인 변화가 가능하다”고 밝혔다.
“내가 녹색 선두” 경쟁
이런 분위기 속에서 개별 은행도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우선 녹색금융으로 가는 관문인 것처럼 대부분 시중은행이 ‘적도원칙(Equator Principles)’에 가입하거나 가입 추진 중이다.
적도원칙은 환경적 책임 강화와 관련해 전 세계적으로 가장 영향력이 큰 국제협약이다. 대규모 개발 사업이 환경 훼손 등 환경적, 사회적 기준을 준수하지 않을 때 자금을 지원하지 않겠다는 금융기관들의 약속이다. 현재 37개국 115개 금융사가 동참하고 있다.
국내 시중은행 가운데는 신한은행이 지난해 9월 처음 가입했다. 이어 지난 2월 KB국민은행이 가입했으며, 우리은행, 하나은행, NH농협은행도 연이어 가입 추진을 선언했다.
녹색산업 지원을 위한 금융상품도 경쟁적으로 출시하는 분위기다. 산업은행은 국내 최초로 녹색채권 평가등급을 획득한 원화 녹색채권 3000억원을 최근 발행했다. 조달자금은 태양광·수소연료전지 발전프로젝트와 친환경 운송 등 사업에 지원될 예정이다.
KB국민은행도 지난달 녹색산업 지원에 들어갈 1000억원 규모의 원화 녹색채권을 발행했다. 하나은행은 친환경 프로젝트를 대상으로 하는 1000억원 규모의 ‘그린론’을 주선했다. 농협은행은 친환경 기업에 운전·시설자금 대출한도를 늘려주고, 금리를 깎아주는 ‘친환경 기업 우대론’을 선보였다.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러나 기후변화 리스크에 대비한 금융권의 대응 수준은 아직 미흡한 상황이다. 한국은행이 지난달 25일 발표한 ‘금융안정 상황’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말 기준 9개 고탄소산업에 대한 국내 금융회사들의 대출, 주식, 채권 보유 규모(익스포저)는 411조원으로 나타났다. 기업 부문에 대한 전체 익스포저(2358조원)의 17.4%에 이른다.
금융회사들의 고탄소산업 금융 지원은 2015년 파리협정 체결 이후 각국의 탄소배출 규제 움직임에도 지속적으로 증가해 2014년 말 375조원에서 6년 새 36조원 늘었다는 게 한은 설명이다. 한은은 “금융기관 간 기후변화 위험 대응에 큰 차이가 발생하면 리스크 관리에 취약한 특정 금융기관에 리스크가 집중되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금융사들로서는 최고경영자가 주도하는 톱다운(top-down) 방식의 녹색금융 강화 과정에서 대출 제약 등을 우려하는 내부 반발도 넘어야 할 관문으로 꼽힌다. 아직 녹색기술의 경제성에 대한 금융권의 평가 능력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다.
지호일 기자 blue5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