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강원도 속초종합운동장. 보수 공사로 부산한 훈련 환경 속에서도 투구구역에 자리잡은 정호원(34·강원도장애인체육회)의 집중력은 흔들리지 않았다. 하얀색 표적구까지 각도와 거리를 숨죽이고 지켜본 그는 이윽고 경기보조자 이문영(36) 감독에게 “3번이요”를 외쳤다. 이 감독이 해당 위치에 홈통(공을 굴려 보내는 기구)을 설치할 동안 정호원은 철제 안테나에 셔틀콕의 코르크 부분을 붙여 만든 마우스 포인트를 입에 물었다. 전동 휠체어 위에서 몸을 튼 그가 홈통 위의 공을 마우스 포인트로 톡 건드리자 데굴데굴 구른 빨간 공은 표적구 바로 옆에 안착했다.
이 종목은 이름도 생소한 ‘보치아’. 뇌성마비를 비롯한 중증장애인들이 즐기는 스포츠로 패럴림픽 정식 종목이다. 맞상대하는 두 팀 선수가 번갈아 공을 투척한 뒤 표적구로부터 가까운 공의 점수를 합해 1게임 4엔드 경기로 승패를 결정짓는다. 정호원은 그 중에서도 팔을 움직이기 힘든 선수들이 나서는 세부종목인 ‘BC3’ 선수다.
정호원은 “보치아는 중증장애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스포츠 종목”이라며 “조금이라도 알고 보면 경기 내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다이내믹한 경기”라고 설명했다.
정호원은 생후 100일 무렵 뇌성마비 1급 장애를 얻었다. 어머니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침대에서 떨어지며 뇌에 충격을 받은 탓이다. 혼자 밥을 먹을 수도 없을 정도라 활동보조사가 식사 등을 챙겨줘야 한다. 그런 그가 보치아를 접한 건 충주 숭덕학교에 재학 중이던 1998년 무렵. 체육 선생님의 권유로 시작한 보치아는 그의 삶에 활력을 불어 넣었다. “체육시간에도 전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책만 보고 있었죠. 그런데, 보치아를 처음 한 날 공이 제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게 너무 기뻤어요.”
보치아에서 정호원은 승승장구했다. 입문 4년 만인 2002년 태극마크를 달았고, 2009~2016년엔 세계랭킹 1위를 고수했다. 그리고 2008 베이징 페어(단체전) 금, 2012 런던 개인전 은, 2016 리우데자나이루 개인전 금·페어 은 등 3번의 패럴림픽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뒀다. 이문영 감독은 “정호원 선수는 경기장 바닥 상태를 가장 빠르게 캐치한다”며 “중요한 순간에 동요하지 않고 침착함을 유지하는 것도 강점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다만 리우패럴림픽 이후 우여곡절이 많았다. 메달을 딴 뒤 받은 포상금(9000만원) 탓에 기초생활수급권이 박탈돼서다. ‘국위선양’을 했을 뿐인데 매달 70여만원의 수급비와 의료비 지원·주거 혜택 등 장애인이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사라졌다. 이 문제가 보도되며 사회적으로 ‘반짝 관심’을 받았지만 그 때 뿐이었다. 정호원은 “대회가 끝나고 허무함이 컸다. 메달을 따도 아직 ‘보치아가 뭐예요’ 물어보는 분들도 많다”며 “장애인 경기밖에 없는 비인기종목이지만 많이 성원해주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다행히 강원도에 보치아 실업팀이 생기면서 정호원은 생계 걱정을 놓고 운동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얼마 되지 않는 월급이지만 이마저도 일부를 매 학기 모교의 후배 선수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쓰는 그다. 장애인으로서 생계와 운동을 병행하는 어려움을 잘 알고 있어서다.
정호원은 도쿄에서 숙원인 2관왕(개인·페어)에 도전한다. 리우 이후 허리 부상 탓에 1년을 재활로 보낸 그의 세계랭킹은 3위까지 떨어졌다. 그 사이 오랜 2인자였던 그레고리오스 폴리크로니디스(그리스)가 1위로 올라섰고, 일본에선 가와모토 게이스케(18위)라는 ‘신예’가 무섭게 치고 올라왔다. 두 선수는 근이영양증이나 경추장애를 갖고 있어 뇌성마비 선수들보다 조준할 때의 신체 떨림이 덜하다. 게다가 도쿄패럴림픽엔 해외 관중은 물론이고 장애인 선수 지원 인력 입국까지 제한돼 일본 선수들에게 유리하다.
코로나19도 정호원에겐 악재다. 장애인 선수들은 기저질환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아 코로나19에 더 취약하다. 이 때문에 대한장애인체육회는 선수들의 외출을 자제시키고 있다. 1년 동안 국내대회도 모두 취소됐다. 기흉성 폐질환을 앓고 있는 정호원도 집에서 영상 분석이나 홈트레이닝을 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다행히 다음달 12일부터는 이천훈련원에서 국가대표 합숙훈련이 시작된다. 김한수(경기도청), 최예진(충남도청) 등 단체전 출전 선수들도 소집돼 함께 본격적으로 메달 획득을 위한 담금질에 들어간다. 빡빡한 일정 탓에 대회가 끝나고 각종 질병이 악화되기도 했고, 이번엔 코로나19 감염 위험성까지 있지만 정호원은 비장하다.
“패럴림픽은 보치아를 알릴 수 있는 기회라 저에겐 의미가 커요. 일본 땅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졌으면 좋겠다는 욕심도 있어요. 무엇보다 좋은 결과를 얻어서 코로나19로 힘든 국민들께 조금이나마 감동을 드리고 싶습니다.”
속초=글·사진 이동환 기자 hu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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