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앞에 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습니다. 다양한 문제가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문제마저 짊어지다 보니 녹록지 않아 보입니다. 개중에는 코로나 상황에서의 어려움을 넘어, 기독교인이 되기 이전으로 되돌아가려는 모습마저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되돌아가려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보낸 사도 바울의 호소를 들어보는 것은 시의적절해 보입니다.
되돌아가는 것은 단지 신앙의 부재로만 해석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 ‘관계’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현재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의 영향을 받습니다. 게다가 교사처럼 떠받드는 사람이라면 말 다 했지요. 바울은 멀리 있지만, 갈라디아인들 곁에는 늘 거짓 교사들이 함께하며 가르치고 시간을 보냈기에 자연스레 영향을 받습니다. 주로 어울리고 나누는 이가 누군지 돌아봐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교회공동체는 선택이 아니라 본질입니다.
둘째로, 과거의 ‘경험’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성적 쾌락에 젖었던 이들, 부정을 통해서라도 큰돈을 만지고 호의호식했던 이들이라면, 회심 이후라도 그 기억이 여전히 남아있기에 찾아오는 유혹 앞에 쉽게 되돌아갈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어떤 악인이라도 예수 믿을 수 있지만, 애초에 악을 경험하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특히 백지 같은 다음세대라면 더 중요합니다.
셋째는 ‘습관’입니다. 익숙한 삶의 방식대로 사는 것이지요. 악의 관성력을 선의 관성력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새로운 습관을 만드세요. 단 늘 말하듯, 큰 결단을 하기보다 작은 습관을 바꿔나가는 게 중요합니다. 관계가 습관 형성을 뒷받침합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표면적 이유이고, 사실 모든 인간에게 해당하는 근원적 문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마지막 이유이자 근원적 이유, 우리가 여전히 죄성을 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주인 삼은 후에도 언제나 주권이 나에게 있기를 욕망합니다. 그런데 ‘믿음’은 그것을 전면으로 부정합니다. 믿음의 여정을 걷다 보니 자기 계산과 달리 목적지가 안 나오고 점점 으슥한 데로 가는 것처럼 느낄 때, 많은 이들이 포기하고 맙니다. 인간은 사실 믿음으로 현실을 끌고 가는 게 아니라, 보이는 것을 기반으로 믿음을 재해석하곤 하니까요. 갈라디아 교인들의 되돌아감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호소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우리를)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돌아가서….”(갈 4:9) 바울은 너희가 분명 하나님을 안다, 즉 믿는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하나님도 우리를 안다고 합니다. ‘안다’는 말은 성경에서 늘 관계적 의미로 사용됩니다. 갈라디아인이 되돌아가려는 이유는 결국 믿음의 문제였습니다. 그가 나를 자녀 삼아주셨다는 확고한 믿음의 희미해짐이, 율법을 취하거나 방종으로 나가게 했지요.
우리도 되돌아감을 막기 위해 바울의 호소에 귀 기울이며 내가 믿는 바가 무엇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이 호소는 동시에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그가 나를 아신다는 건, 이런 나의 인간적 연약함마저 다 알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다 알고도 끌어안고 거기에 맞춰서 인도하십니다. 특히 성령 하나님의 역할이 그러합니다. 태가 죽었던 사라를 통해 끝내 생명을 낳게 하셨던 하나님께서는, 마찬가지로 이미 선을 만들어낼 가능성이 없는 나를 통해 끝내 생명을 낳게 하십니다. 자녀 삼아주셨고 끝내 이루신다는 약속 위에 굳게 서십시오. 자녀인 당신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인도해가실 것입니다.
손성찬 이음숲교회 목사
◇이음숲교회는 도시 속 쉼 공동체로, 하나님과 사람을 잇고자 합니다. 젊은이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찾는 이가 하나님과 인격적 만남을 갖고 공동체를 누리게 하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