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을 지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십자가 이야기가 지금도 여러분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거듭났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정말 거듭났는지를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가족들조차 우리의 거듭남을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거듭났다는 사실이 하나님만 아시고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그런 것입니까. 목사가 도덕적 실패를 이유로 교회를 사임했다는 이야기는 더 이상 뉴스거리가 아닙니다. 그들이 십자가를 몰라서 그럴까요. 교회 안에 어려움이 생겼을 때 흔히 듣는 말은 ‘기독교인이라고 완전하지 않다. 용서받았을 뿐이다. 교회는 천국이 아니다. 병원이다. 환자들이 모인 곳이다. 그러니 서로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과연 그런 것입니까.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다른 것이, 죽고 난 다음 천국 가는 것만 다르다면 그것이 과연 복음입니까.
목사가 고난주간 설교를 잘하기는 어렵습니다. 성도 모두 잘 아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재방송도 한두 번이지, 죽을 때까지 고난주간에 같은 내용의 설교를 듣는데 감동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같은 내용이라서 감동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남의 이야기이기에 감동이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야기는 수백 번 반복해도 새롭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것은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것을 믿는 것만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정말 나와 한 몸이 되시고 옛사람은 죽고 예수님이 나의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생명이 바뀌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우리의 죄가 용서받는 것은 우리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연합해 한 몸이 됐기 때문입니다.(롬 6:3)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고 고백한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만 죽은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도 죽었고 우리 자신도 죽었습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것이 힘들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정말 힘든 것은 나는 죽지 않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답답하기만 하다면 자아가 죽지 않은 채 발버둥 치기 때문입니다. 가정이 행복하지 않다면 가정 안에 자아가 죽은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죄를 이기며 살고 싶습니까. 기쁨과 감사의 삶을 살며, 오직 사랑만 하며 살고 싶습니까. 살아 있는 기도의 삶을 원하십니까. 가정을 구원하기 원하십니까. 직업 속에서 주의 일을 하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십자가 하나면 충분합니다! 우리에게 이런 구원의 삶을 주시려고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나는 죽었습니다’ 하며 고백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제 ‘나 자신의 십자가 죽음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제 부친은 6·25전쟁 때 피난을 나오셨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6·25전쟁과 피난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국군이셨고 큰아버지는 인민군이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하실 말씀이 많았겠습니까. 부친이나 친척들의 눈빛을 보면 달랐습니다. 언제나 지금 전쟁을 겪은 듯하셨습니다. 우리 민족사에 6·25전쟁이 있었지만, 그분들에게는 자신의 6·25전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6·25전쟁은 언제나 현재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십자가 사건이 그렇습니까. 고난주간이라고 십자가만 쳐다보고 지나가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죽음을 봐야 합니다. 이제 장례식을 치르고 산다고 여기십시오. 십자가를 볼 때마다 ‘나는 죽었습니다’를 입으로 시인해야 합니다. 그때 주님은 우리 삶에 진정한 구원 역사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세상을 바꾸어 가실 것입니다.
(선한목자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