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무는 메르켈 시대… 녹색당, 독일 정치의 미래가 될까

입력 2021-04-03 04:04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지난달 24일(현지시간) 베를린에서 열린 주례 내각회의에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메르켈 총리는 올 들어 코로나19 대응에서 잦은 혼선을 보이며 비판에 휩싸였다. AP연합뉴스

오는 9월 독일 총선을 끝으로 정계 은퇴를 예고한 앙겔라 메르켈(66) 총리의 하산길이 갈수록 험난해지고 있다. 장기화되는 코로나19 위기는 지난 16년간 견고했던 메르켈의 리더십에 균열을 냈다. 메르켈이 흔들리면서 그가 이끄는 기독민주당(CDU·기민당)과 기독사회당(CSU·기사당) 집권 연대도 추락하고 있다.

메르켈의 중도우파 블록이 무너지고 있지만 연정 파트너이자 전통적 좌파 정당인 사회민주당(SPD·사민당)은 지지부진하다. 그 빈틈을 헤집고 녹색당이 수권정당의 면모를 갖추며 약진하고 있다. 메르켈 이후 독일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핵심 정치세력으로 성장한 것이다. ‘그 어떤 것과도 다르게 독일을 대표하고 형성하는 필수불가결한 정치세력’이 되겠다는 녹색당의 꿈이 점차 현실화되고 있다.



길어지는 코로나… 메르켈조차 속수무책

지난달 14일(현지시간) 독일 남서부 바덴뷔르템베르크·라인란트팔츠주(州) 두 곳에서 실시된 지방의회 선거에서 메르켈 총리의 기민·기사당 연합은 참패했다. 각각 녹색당·사민당 소속인 기존 주총리들의 승리가 예상됐다는 점에서 이변이 일어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언론들은 직전 선거와 비교해 더 벌어진 각 정당의 득표율 격차에 주목한다.

바덴뷔르템베르크에서 기민당은 24.1%를 득표해 5년 전 27% 대비 2.9% 포인트 하락했다. 녹색당은 이전 선거(30.3%)보다 2.3% 포인트 오른 32.6%를 득표해 기민당을 여유있게 따돌렸다. 라인란트팔츠에서도 사민당이 35.7%를 득표, 기민당(27.7%)을 압도했다. 양당 격차는 2011년 0.5%, 2016년 4.4%, 올해 8%로 계속 커지고 있다.

특히 이번 선거는 오는 9월 26일 독일 총선을 6개월여 앞두고 실시돼 전초전이라는 성격이 짙었다. 영국 가디언은 “지방 선거 결과를 가지고 9월 총선에 대한 광범위한 예측을 도출하긴 어렵다”면서도 “기민당 중진들은 이번 결과를 ‘경종’으로 표현한다”고 전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메르켈 총리는 보건부 장관과 의료 전문가들이 매일 코로나19 상황을 브리핑하도록 하는 등 정확한 의사소통과 과학에 기반한 팬데믹 관리로 국내외 찬사를 받았다. 지난 16년 집권기 동안 그가 선보였던 실용과 합리성의 리더십이 다시금 빛을 발했다는 평가였다.

하지만 팬데믹의 장기화는 메르켈조차 속수무책으로 만들었다. 지난달 초 기민당 연방의원과 기사당 원내부대표가 정부의 방역 마스크 조달 사업에 개입해 납품을 중개하고 그 대가로 업체로부터 수억원의 뒷돈을 챙겼다는 스캔들이 터지면서 독일 사회가 발칵 뒤집혔다. 메르켈 자신의 부패는 아니었지만 지방선거 직전에 터진 여권 정치인들의 부패 사건은 기민당 참패의 핵심 원인으로 지목됐다.

더딘 백신 보급과 접종 속도도 당정의 감염병 대응 실패로 간주되며 메르켈의 발목을 잡고 있다. 독일 국내 여행은 금지하면서 스페인 휴양지 마요르카로 가는 건 허용하는 등 모순적이고 갈팡질팡하는 정책도 비판을 받았다. 극우 세력은 메르켈의 엄격한 코로나 봉쇄로 인한 피로감을 자극해 대규모 방역 반대 시위를 벌이며 메르켈을 흔들고 있다.



실용으로 무장한 녹색당… 유연성인가 변절인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정치를 이끌어온 기민·기사당 연합과 사민당, 두 거대 세력이 최근 주춤하는 사이 녹색당은 눈부신 성장세를 보이며 단순 대안정당을 넘어 정국을 좌지우지하는 캐스팅 보트로 떠올랐다. 워싱턴포스트(WP)는 녹색당은 포스트 메르켈 시대의 중추적 역할을 노리고 있으며 심지어 집권에도 도전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지난달 28일 공개된 주간지 빌트 암 존탁 여론조사에서 메르켈의 중도우파 블록은 25% 지지율을 기록해 23%를 기록한 녹색당을 간신히 따돌렸다. 좌파 진영을 대변하는 사민당은 17%로 3위에 그쳤다. 지난달 17일 독일 여론조사기관 포르자의 조사에서도 녹색당은 29% 지지율을 기록한 중도우파 블록에 이어 21%로 2위를 차지했다. 2017년 총선 당시 녹색당 지지율이 8.9%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놀라운 성장이다. 녹색당은 현재 독일 16개 주정부 중 11곳에서 연정에 참여하고 있다. 기민당(10곳)보다도 많다.

녹색당의 대약진은 폭염과 홍수 등을 겪으며 기후변화가 핵심 사회문제로 떠오른 유럽 사회의 분위기와도 관련이 있다. 적극적 기후대응을 주창하는 녹색 정당의 돌풍은 독일만의 특성이 아니며 유럽 대륙 곳곳에서 발견된다.

다만 의원내각제 국가로 연정이 일상화된 독일 정치 풍토 속에서 1980년 창당 당시의 급진좌파 색채를 빼고 유연하고 온건한 정당으로 변모했다는 점에서 독일 녹색당은 유럽의 다른 녹색 정당들과 차이가 있다. 이미 1998년 슈뢰더 정권에서 사민당과의 중도좌파 연정에 참여한 경험도 있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와 가디언 등은 바덴뷔르템베르크에 주목한다. 전통적 제조업 지역으로 친기업·보수 성향 유권자가 많아 본래 보수 텃밭으로 분류되던 곳이다. 이곳에서 독일 16개 주총리 중 유일한 녹색당 소속으로 10년째 집권 중인 빈프리트 크레치만(72)은 실용주의의 기치하에 ‘기업 친화적 녹색 정치’를 주장하는 인물이다. 보수주의자라 불리는 것도 꺼리지 않는 그는 오랫동안 녹색 이슈들이 혁신 및 부의 창출과 결합돼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크레치만의 우클릭은 일정 부분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 독일 공영 ARD방송은 5년 전 기민당을 선택했던 14만5000표가 이번 지방 선거에서 녹색당으로 대거 이동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어려움을 겪는 주내 자동차 회사들을 지원한다는 목적하에 오래된 차를 폐기하고 새로운 디젤·가솔린 차량을 구매하도록 장려하는 등 크레치만의 타협적 정책이 녹색당의 뿌리를 잊게 만든다는 비판도 상당하다. 기민당 2중대에 불과하다는 비난까지 나온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