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지 않는 샘·통곡의 벽… ‘교회 순례길’ 걸으며 깊은 영성 체험해요

입력 2021-03-29 03:02
한명수 경복교회 목사가 지난 25일 서울 종로구 교회 입구에서 ‘십자가의 길’ 묵상 프로그램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신석현 인턴기자

코로나19로 대면 모임이 어려운 가운데 교회 안에 작고 소박하지만 경건한 비대면 순례 코스를 마련해 성도 개개인의 영성 순례를 돕는 교회가 있다. 서울 종로구 인왕산 자락에 있는 66년 역사의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 경복교회(한명수 목사)다.

지난 25일 경복궁 옆 국립서울맹학교를 지나니 언덕 위 경사지에 하얀 경복교회가 나타났다. 사순절을 알리는 보라색 현수막엔 기도·금식·나눔이 적혀 있었고 그 아래 교회 입구엔 나뭇가지를 재활용한 십자가가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성도들은 이곳에서 작은 십자가를 들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는 말씀을 읽은 뒤 계단을 올랐다. 교회가 사순절을 맞아 새로 만든 ‘십자가의 길’ 묵상 프로그램이다.

계단은 코로나19 공동식사 금지로 폐쇄됐던 교회 친교실로 향한다. 친교실을 쓰지 못한 지난해 교역자들은 이곳에 과거부터 있던 샘물을 복원했다. 바닥 시멘트를 걷어내고 작은 분수와 조명, 음향 장치를 추가했다. 성도들은 이곳에서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는 말씀을 묵상하며 잠시 물소리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교회 친교실에 마련된 '마르지 않는 샘'. 신석현 인턴기자

마르지 않는 샘을 지나면 이스라엘 ‘통곡의 벽’과 같은 기도처가 나타난다. 인왕산 암벽 축대를 거쳐 예배당으로 올라가는 컴컴한 길인데 교역자들은 이곳에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담은 목판화를 배치하고 기도문을 작성하는 공간으로 꾸몄다. 이윽고 도달한 삼각형 예배당에 들어서면 강대상 앞에 들고 있던 십자가를 내려놓고 각자 성찬기 안에서 떡을 꺼내 들고 포도즙을 마신다. 스테인드글라스 아래 은은한 조명의 십자가가 내려다보는 예배당에서 성도들은 각자 떨어져 자유롭게 기도한 뒤 돌아간다.

예배당 전경. 신석현 인턴기자

한명수(55) 목사는 “코로나 시기를 맞아 기독교적 영성이 더욱 절실해졌는데 교회가 어떻게 응답해야 할지를 고민했다”고 말했다. 감염 우려로 모임은 물론 성찬식도 제대로 못 하지만, 성도 개개인이 홀로 말씀을 묵상하며 교회를 순례하듯 찾아 기도할 수 있다면 신앙의 깊이가 더 깊어질 것이라고 봤다. 모이는 교회에서 흩어지는 교회로, 닫아두는 교회에서 개방하는 교회로 슬기롭게 전환해 가는 움직임이다.

이날 오전 순례 코스에 참여한 김영길(65) 권사는 “과거엔 성경공부 기도모임 등으로 몰려다니는 일이 많았다면 이젠 각자가 따로 와서 내면을 들여다보며 깊이 있는 기도를 할 수 있어 좋다”고 했다. 마리리(63) 집사도 “지난해 3월부터 하지 못한 성찬을 1년 만에 하니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의 의미가 더 절실하게 다가왔다”고 말했다.

경복교회는 사순절 기간에만 십자가의 길을 운영하려 했으나 코로나19 시대 교회의 비대면 영성 코스 활용도가 높다는 점에 주목해 상시화 방안을 검토 중이다. 한 목사는 “인왕산 등산객이나 서촌 관광객 등 누구나 교회에 들러 기독교와 십자가의 의미를 마음으로 느끼면 더 좋겠다”고 말했다.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