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을 나뭇가지에 걸어 천장부터 길게 늘어뜨렸다. 겹겹의 천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기하학적 무늬가 수놓아져 있다. 고대의 언어처럼.(세실리아 비쿠냐 개인전)
# 무슨 사연인지 온몸에 칼을 맞고 시신을 어깨에 맨 채 변기에 앉아 있는 남자. 끔찍하지만 묘한 슬픔을 자아내는 그림을 둘러싼 액자에는 불탄 흔적과 깨진 유리가 그대로 남아 있다.(릭 프롤 개인전)
세실리아 비쿠냐(73)와 릭 프롤(63). 세계적으로 활동하는 원로 작가지만 한국에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두 작가가 서울의 대표적인 두 갤러리를 통해 한국 신고식을 한다.
서울 종로구 율곡로에 소재한 미국 리만머핀 갤러리 한국 지점에선 칠레 태생으로 영국에서 활동하는 비쿠냐를 선보인다. 런던 테이트 미술관과 뉴욕 솔로몬 R. 구겐하임박물관 등 유수 뮤지엄에 작품이 소장돼 있고, 올해 광주비엔날레에도 초대받은 세계적인 작가이지만 한국에서 개인전은 처음이다. 전시 제목은 ‘키푸 기록’. 키푸는 고대 안데스 산맥에 살던 원주민들이 염색한 끈으로 만든 매듭을 이용해 세금, 인구, 날짜 등을 표시하며 의사소통을 하던 일종의 문자다. 스페인이 황금을 찾아 페루를 침략하면서 파괴된 전통이기도 하다. 작가는 고유 문화의 상실, 식민화를 상징하는 키푸를 끌어온 설치 작품으로 미술계에 이름을 알렸다.
이번 전시에선 원래 사용했던 두꺼운 천 대신에 한국의 한복 천을 사용하기도 하고, 키푸에 그림을 그린 ‘키푸 회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키푸 회화에는 칠레 원주민 소녀가 건네받은 책이 함께 표현돼 있다. 작가는 칠레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 1973년 영국으로 망명 했다. 망명 시절 역시 그곳으로 이주해온 베트남 여성들을 만났다. 베트남 전쟁에는 소녀들까지 동원됐는데, 그림 속 책은 바로 그 베트남 소녀들이 건네는 것이다. 책은 베트남 소녀에 대한 헌사이자 여성끼리의 국제적 연대를 함의한다. 전시된 작품은 75년 회화로 그린 걸 판화로 다시 제작한 것이다.
꿈에서 온몸이 젖꼭지로 뒤덮힌 비쿠냐를 봤다는 친구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은 자화상, 고대 키푸의 매듭을 연상시키는 철사 설치 작품 등도 볼 수 있다.
비쿠냐의 작품에서는 대체로 시적 정서가 느껴진다. 시인이기도 한 그녀는 자신의 작품을 ‘이미지로 표현한 시’라고 말한다. 올해 광주비엔날레에도 1960~70년대에 만든 평면 작품과, 유실된 자신의 회화를 재현한 신작들을 선보인다.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리안갤러리에서 소개하는 릭 프롤은 ‘검은 피카소’로 불리는 장 미셸 바스키아의 친구이자 어시스턴트로 활동했던 작가다. 뉴욕의 슬럼가 이스트 빌리지에 예술 공동체가 부상하던 1980년대에 낙서 미술을 하던 바스키아, 키스 해링 등과 함께 활동했다.
이번 전시의 기획자이자 당시 그들과 함께 뉴욕에서 작업했던 최종열 작가는 그때의 이스트 빌리지 분위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불타버린 빈집이 널려 있었어요. 집주인들이 임대료를 받지 못하니 보험료라도 받으려고 불태운 거죠. 그런 빈집들에 가난한 화가들이 모여들어 작업을 했습니다. 가수 마돈나도 거기서 살았던 적이 있지요.”
릭 프롤은 불탄 집의 창틀을 잘라내 그대로 액자로 쓰기도 했다. 전시장엔 그런 액자에 담긴 그림들이 전시돼 아웃사이더들의 거주지였던 80년대의 슬럼가 뉴욕 이스트 빌리지를 증언하다. 그가 형상화한 인물들은 고통스러워 보인다. 한 손엔 깨진 유리병을 들고 한 손엔 붕대를 감은 작품도 있다. 20세기 초 파리에서 활동했던 표현주의 화가 에른스트 키르히너가 전쟁으로 손이 잘린 병사의 모습으로 그린 자화상을 오마주해 그린 것이다.
프롤의 회화에 등장하는 남자들의 몸에는 칼날이 꽂혔다. 변기에 앉아 시신을 짊어지고 있는 장면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의 패러디처럼 읽힌다. 이처럼 끔찍하게 현실을 고발하는데도 낙서 그림이 갖는 역동성이 있다. 그 힘은 검은 색을 주조로 하면서 자유분방하게 구사한 파랑, 노랑, 빨강 등 원색의 에너지에서 오는 거 같다. 두 전시 모두 4월 24일까지.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