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3월 1일 중국 베이징엔 황사가 유난히 짙었다. 새벽 5시 10여명 교인이 교회에 모였다. 중국 공산당의 압력으로 새 예배 처소를 빌려야 하는 절박함 속에서 새벽 기도를 드리기 위해 자모실로 향하는데 안에서 밝은 빛이 쏟아졌다. ‘간밤에 불을 켜뒀나’ 생각했는데 전등 불빛이 아니었다. ‘아’하고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나만 아니라 당시 함께했던 성도들이 모두 기이한 빛을 목격했다.
바로 예배를 시작했지만 말씀을 전하는 목사님이나 듣는 교인이나 모두 눈물을 흘리느라 서로 무슨 말을 하는지 듣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얼굴 위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고 연신 코를 훔치며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했다. “고맙다. 너희들 덕분에 중국 땅에 새벽기도가 시작되는구나.”
중국은 복음의 불모지였다. 그곳에서 우리가 캄캄한 새벽을 기도로 깨운 것이다. 시작은 빛 한 점으로도 충분하다. 동이 트면 어둠이 물러갈 것이고, 곧이어 빛이 사위를 가득 채울 것이다. 나는 중국 대륙을 가득 채울 빛을 미리 본 목격자가 됐다.
예배 장소를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던 당시 공로명 외교부 장관이 중국을 공식 방문했다. 공 장관 부인이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어서 당시 우리가 처한 상황을 전하고 도움을 구했다. 며칠 지나 중국 공산당 종교부에서 전화가 왔다. 임대차 계약을 갱신할 수는 없지만, 500명 수용 가능한 21세기호텔의 3층 공간을 빌려주겠다고 했다. 외부로부터 비교적 차단된 곳이라 한인 크리스천이 많이 모여도 안심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교인 수가 700명이 넘는데 500명밖에 수용할 수 없어 고민이 됐다. 회의 끝에 예배를 분산하기로 했다. 오전 9시에 성인예배, 오전 11시에 청년예배를 드렸다. 그러자 오히려 교인 수가 늘어서 몇 달 후에는 오후 2시 3부 예배까지 생겼다. 나는 경배와 찬양팀을 구성해 찬양 예배를 섬겼고 문봉주 공사는 청년부 성경공부반을 맡았다. 문 공사가 새 예배 처소를 구하기까지 중국 정부를 상대로 뛰던 모습이 선하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역사를 목도했다.
96년 12월 우리나라는 선진국 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다. 나는 곧바로 주OECD 대한민국 대표부 초대 공사로 임명돼 프랑스 파리 땅을 다시 밟았다. 시차에 적응할 틈도 없이 집행위원회 회의에 참석해야 했는데, 우리나라 국회의 노동법 개정안 날치기 처리로 처음부터 궁지에 몰릴 상황이었다. 나는 OECD 본회의장에 들어가 프랑스어로 우리나라의 입장을 정성껏 설명했다. 5분쯤 지났을까 마리 끌로드 카바나 프랑스 대사가 손뼉을 치며 ‘브라보 꼬레’를 외쳤다. 한국 대표의 유창한 불어를 들으니 문화적 동질감을 느낀다고 했다. 노동 문제를 시비로 삼기보다 일단 한국의 OECD 가입을 환영하자는 분위기로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정리=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