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거릿 애트우트는 ‘글쓰기에 대하여’에서 선언하듯 말한다. “고백부터 해야겠다. 나는 작가이자 독자다. 그리고 그게 전부다.” 글쓰기의 영역에서 우리의 신분은 둘 중 하나다. 작가 아니면 독자. 그리고 같은 영역에서 둘은 자주 조응한다. 작가는 독자가 되어야 한다. 독자는 작가가 될 수 있다. 마거릿 애트우드가 좋은 작가임을 설명하는 데 따로 시간을 들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작가 또한 여섯 번의 강연으로 이루어진 이 책에서 굳이 자신이 얼마나 좋은 작가인지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좋은 작가가 되기 위한 왕도나 요령이 이 책에는 없다. 글쓰기의 방법론이 두드러지는 것도 아니다. 과장해 말하자면 이 책은 현재 인류를 대표하는 한 작가가 고백하는 ‘독자’로서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쓰는 삶을 위해 읽는 삶은 필수적이다. 작가의 자아, 작가의 이중성, 작가의 생활, 작가의 영감과 작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작가됨’을 설명하는 데 쓰이는 사례와 논증은 모두 그의 ‘독자됨’에서 비롯됐다.
아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로 시작한 그 여정은 오비디우스의 시로 맺음 된다. 그리고 ‘글쓰기에 대하여’를 읽은 마거릿 애트우드의 독자들은 더욱 대단한 독자가 되기 위해 혹은 지금의 자신과는 다른 독자가 되려고 다음 읽을 책을 찾을 것이다. 그중 누군가는 작가일 테다. 작가 모두는 또한 독자이다. 쓰는 사람은 연중무휴 무언가를 읽는다. 무언가를 읽는 사람은 무언가를 남긴다. 작가와 독자라는 갈림길에서 그들은 존재론적으로 스치는 것이다. 그 스침이 우리를 고양되게 하고 질투하게 하며 윤리를 주장케 하고 기술을 연마케 한다. 죽음을 독파하게끔 하고 결국 목소리를 남기게 한다. 읽지 않으면 그 스침의 순간은 오지 않는다. 연신 모래를 파내야 했던 사내처럼, 쓰려는 자는 읽으려는 자아를 끝내 버릴 수 없다.
임지은 작가의 산문집 ‘연중무휴의 사랑’을 이어서 읽었다. 책은 그 생김새처럼 평평하다. 세계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소설가의 강연록과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1990년대 생 저자의 산문집을 나란히 놓을 수 있다. 운 좋게도 각각의 책이 독자에게 남긴 무게감 또한 각자의 방식으로 묵직하다. 애트우드의 화려한 사유도 좋았지만 임지은의 내밀한 문장도 못지않았다. 애트우드의 시작이 모래의 여자였다면 임지은의 시작은 미경이라는 여자다. 미경은 저자의 엄마이자, 이혼 가정의 실질적 가장이고, 끝없는 노동에 시달리는 자영업자이다. 그리고 페미니스트인 저자의 “가슴에서 천불을 치솟”게 하는, 중년 여성이기도 하다. 책의 문장처럼 우리는 모르는 사람보다 가까운 사람을 더 견디지 못한다. 작가는 엄마인 미경에게 상처받고, 또한 상처를 준다. 그리고 엄마를 밀어내는 ‘나의 페미니즘’을 돌아본다.
‘연중무휴의 사랑’의 미덕은 사랑에 있다. 그것도 쉬지 않는 사랑. 사랑의 시작이 엄마임은 전형적이지만 별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작가는 엄마를 밀어내고 있지 않다. 엄마에 대한 어떤 것도 놓지 않은 채 당기는 중이다. 그의 당김은 그러니까 사랑은 엄마에서 동생으로, 친구와 연인으로, 우연히 만난 택시 기사와 윗집 아저씨에게까지…. 다양한 대상으로 확장된다. 이는 당김(사랑)의 주체인 자기 자신에 대한 성실한 인식과 타인에 대한 다정한 태도가 있음에 가능한 일이다. 이 책을 읽는 시간은 그 인식과 태도를 배우는 시간이었다. 보다 개인적으로는 1980년대에 태어난 남성으로서 온전히 독자로 돌아간 시간이었다. 흑자로 인생을 시작한 주제임을 파악한 시간이자 나 자신의 무해함을 의심한 시간이기도 했다. 그 시간을 용케 통과해 이렇듯 안전한 양지에서 헛기침 비슷한 글을 쓴다.
애트우드는 앞의 책에서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주변을 모두 해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해석하지 않으면 우리는 죽는다고 했다. 언어는 도덕적으로 중립적이지 않다고도 했다. 그 말에 용기를 얻어 감히 글을 더 이어갈 수도 있겠다. 나는 임지은 작가의 편이 되고 싶다. 세계에 대한 임지은 작가의 남은 해석이 궁금하다. 독자로서 그의 다음 글을, 다음 책을 연중무휴, 기다릴 것이다.
서효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