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n번방 보도를 지켜준 분들께

입력 2021-03-25 04:08

지난 주말 TV 채널을 돌리다 한 강력반 형사의 얘기를 들었습니다. 정희석 형사는 13년 미제사건이었던 강도강간 사건 범인을 DNA 감식을 통해 검거한 후 그 사실을 피해자에게 통보했던 경험을 들려줬습니다. 피해자에게는 잊고 싶은 과거일 텐데 잘못 얘기를 꺼내면 트라우마가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아 고민했다는 얘기였습니다. 상담까지 거친 끝에 어렵사리 전화를 걸어 경찰임을 밝힌 그에게 피해자는 “혹시 잡혔어요?”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너무 늦게 잡아 죄송하다”고 말하자 피해자는 “이 전화를 너무 오랫동안 기다렸다. 감사하다”며 한참을 울었다고 했습니다.

경찰의 일이 기자의 일과 비슷한 부분이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참혹한 사건을 현장에서 맞닥뜨리는 점에서 경찰의 일은 더 힘들겠지만 피해자의 아픈 기억을 끄집어내야 한다는 점은 닮은 부분이 있습니다. 그 일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는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깊은 상처를 덧내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도 물어보고 이를 알려야 하는 것이 기자의 일임을 되새깁니다. 어쩌면 직업적 숙명이지요.

지난주 기사화했던 피해자들이 떠올랐습니다. 온라인 성착취 보도 후 1년여가 지난 현재의 모습을 짚는 기사였습니다. 피해자들의 생활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그들의 일상 회복을 위해 사회는 무엇을 했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살폈습니다. 다행히 피해자들이 일상 회복을 위해 힘차게 노력하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지난해 3월 9일 ‘n번방 추적기’ 첫 기사를 내보낸 후 1년여간 온라인 성착취의 실태를 전하고 대책을 촉구하는 기사를 써왔습니다. 확인해보니 국민일보의 ‘텔레그램 n번방 추적기’ 카테고리에는 450건이 넘는 기사가 쌓였습니다. n번방 특별취재팀은 물론 다른 팀, 다른 부서도 문제점을 지적하고 사회의 관심을 촉구했습니다.

끊임없이 고민했습니다. 기존의 범죄와 다른 실상을 전하기 위함이지만 혹 독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 않을지, 끔찍한 현실이 오히려 시민들의 눈길을 돌려버리게 하지 않을지 걱정했습니다. 1년 전 이 코너를 통해 ‘n번방 보도가 불편한 분들께’란 글을 쓴 것도 이 같은 우려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기우였습니다. 국민들은 같이 분노해주셨고, 사법기관은 범죄자들을 붙잡아 단죄하고 있으며, 정부와 국회는 대책 마련에 나서 성과를 냈습니다. 지금도 곳곳에서 온라인 성착취 범죄 근절과 피해자들의 일상 회복을 위해 많은 분들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n번방 특별취재팀은 n번방 추적기와 이후 보도를 통해 한국기자상, 관훈언론상, 인권보도상 등 많은 상을 받았습니다. 후배들의 수상식에 참석해 꽃다발을 전달할 때마다 이 보도의 숨은 공로자들께 꼭 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온라인 성착취의 실태를 처음 전해준 뒤에도 피해자를 보호하고 수사를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앞에서 버텨준 ‘추적단 불꽃’ 친구들에게, 함께 분노하며 기사를 써준 동료이자 경쟁자인 타사 기자들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용기를 내준 피해자들에게는 계속 곁에 서 있겠다는 다짐을 전합니다. 그들이 아픈 기억을 꺼내 놓지 않았더라면 기사를 쓸 수도, 마침내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기사를 읽고 격려해준 독자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기존의 신문 문법과 전혀 다른, 낯선 표현과 섬뜩한 상황이 등장했던 기사도 있었습니다. 그 기사들을 독자들이 외면했다면 사회의 변화는 훨씬 더뎠을 것이고 더 많은 피해자들이 고통 받았을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온라인 성착취의 덫을 끊어내고 있는 과정에는 독자들의 지지와 공감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정승훈 사회부장 s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