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의 티 테이블] 언더독의 승리

입력 2021-03-27 04:01 수정 2021-03-27 08:09

대중에겐 약자가 강자를 이겨주길 바라는 심리가 있다. 매번 우승하는 팀보다는 만년 꼴찌팀이 승리의 역전 드라마를 만들어냈을 때 더 짜릿한 기쁨을 느낀다. 특히 패자 부활로 올라와 우승한 사람을 더 응원하게 된다. 스포츠에선 이길 가능성이 없는 팀이 반전을 일으켜 승리했을 때 ‘언더독(underdog)의 반란’이라고 한다. 투견장에서 유래된 말로 밑에 깔린 개 가 이기기를 바라는 마음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월등한 상대와의 경기, 달걀로 바위 치기와 같은 상황에서 언더독의 승리를 응원한다는 것이다.

언더독의 승리에 열광하는 심리적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우린 성공보다는 실패에 더 익숙하다. 치열한 삶은 승자의 짧은 미소가 아니라 패자의 눈물과 더 닮았다. 어쩐지 약한 팀에 자신을 투영하기가 더 쉽다. 처음부터 완벽한 게 아니라 역경을 하나씩 극복하며 성장하는 모습을 응원하면서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란 긍정의 감정을 느낀다. 무엇보다 역경을 이겨내는 그들만의 ‘필살기’에 창조적인 기쁨을 느낀다. 그들은 대부분 시작은 초라하지만, 열정과 믿음으로 절대 강자를 이겨내는 스토리를 갖고 있다. 약자만이 움켜쥘 수 있는 위대한 승리의 기술이 있다. 기존 법칙을 거부하고 완전히 다른 창조적 시각으로 새로운 룰을 만들어 낸다.

지난 15일 용인체육관에서 열린 여자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에서 정규리그 4위 팀이던 삼성생명이 우승하자 사람들은 언더독의 반란이라며 환호했다. 삼성생명이 15년 만에 정상에 다시 설 수 있었던 데는 인내와 신뢰가 밑바탕이 된 감독의 리더십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임근배 감독은 선수들을 윽박지르는 대신 대화를 나누고 설득했다. 선수 스스로 깨닫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선수들에게 믿음과 자율을 선물한 것이다.

선수들은 이런 마음을 스펀지처럼 잘 흡수했다. 선수들은 “우승을 해서 감독님이 추구하는 방식이 맞았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즉 스파르타식 훈련이 아니라 소통하고 기다려 주었던 그가 옳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것이다. 자칫 성적 지상주의에 빠져 행해지는 스포츠 폭력이 문제되는 가운데 일어난 이런 성과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알려진 임 감독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어렵고 힘들 때마다 하나님이 동행해 주셨기에 정말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미국 작가 말콤 글래드웰은 ‘다윗과 골리앗’에서 “세상은 거대한 골리앗이 아니라 상처받은 다윗에 의해 발전한다”고 말했다. 그는 “엘라 계곡에서 거인과 양치기를 본다면 당신의 눈은 칼과 방패, 그리고 번쩍이는 갑옷을 입은 남자에게 끌릴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아름다움과 가치 중 수많은 것들은 우리가 상상한 것보다 더 많은 힘과 목적의식을 가진 양치기에게서 나온다”고 전했다.

생각해보면 십자가에서 부활해 인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언더독의 승리다. 로마 시대의 십자가 처형은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땅바닥에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대중에게 혐오감을 준다는 측면에서 십자가 형벌에 견줄 만한 다른 형벌 방식은 없었다. 그것이 십자가 처형의 분명한 목적이었다. 그토록 끔찍한 죽음을 선택한 예수님의 ‘그 어리석음’에 동참하고자 한다면 십자가 행위에 담긴 최고의 모순이 우리 삶에 끼치는 영향을 묵상해야 한다.

독일 성직자 안셀름 그륀은 기독교 전통 안에서 두 가지 경향의 영성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하나는 위로부터의 영성이고, 다른 하나는 아래로부터의 영성이다. 아래로부터의 영성은 하나님께서 성서와 교회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상처와 나약함을 통해서도 말씀하신다고 본다. 아래로부터의 영성이 성서에 근거한, 예수의 영성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약함을 통해서 역사하신다. ‘언더독의 영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수동적으로 있으라는 것이 아니다. 각자 삶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도록 자신을 내어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를 통해서도 일하시기 때문이다.

약할 때 강한 힘을 주시는 주님은 고난 주간을 앞둔 지금 우리를 응원하신다. 이 땅의 언더독을 향한 하나님의 시선이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때 강함이라.”(고후 12:10)

이지현 종교부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eeh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