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농단 의혹 재판에서 6연속 무죄를 끊고 ‘1호 유죄’가 나온 배경에는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는 특정 재판에서 명백한 잘못이 있을 경우 판사 지적권한이 있다”는 재판부의 독특한 판시가 있다. 앞서 임성근 전 부산고법 부장판사가 1심에서 ‘위헌적이지만, 남용할 직권 자체가 없었다’며 무죄 선고를 받은 것과는 상반된다.
서울중앙지법 형사32부(부장판사 윤종섭)는 23일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에는 재판사무의 핵심영역에 대해 명백한 잘못이 있을 경우 담당 판사의 잘못을 ‘지적’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밝혔다.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과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의 일부 재판개입 등 행위(직권남용)를 유죄 판단하면서다. 사법농단 관련 재판에서는 처음 나온 판시다.
재판부는 전제로 “직업적으로 충분히 단련하지 못하거나 나태해 쟁점이 별로 없는 것만 우선 처리해 장기미제를 만드는 판사가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런 경우에도 재판 독립을 이유로 누구도 지적을 못한다면 국민의 재판청구권 보장과 충돌할 수 있다”고 했다. 헌법 103조에 따른 법관 독립이 ‘신성불가침’은 아니라는 얘기다. 재판부는 이를 뒷받침할 명시적 규정은 없지만 헌법과 법원조직법 해석상 명백한 잘못을 전제로 사법행정사무를 총괄하는 대법원장과 행정처에 판사를 지적할 권한이 있다고 봤다.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이 법리는 경계가 애매모호한 직권남용죄의 특성 때문에 도출된 것이다. 직권남용은 ‘남용될 직권’의 존재를 전제한다. 표면상 이유로는 수긍할 수 있지만 실제로 따져보면 위법하다는 까다로운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임 전 부장판사의 경우 “각 재판관여행위가 위헌적”이라는 판단에도 불구하고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판사 당시의) 일반적 직무권한에 속한다고 해석될 여지가 없다”며 1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았다.
아울러 재판부는 “공무원의 직무범위를 벗어난 ‘월권행위’도 직무와 상당한 관련성이 인정된다면 직권남용이 성립될 수 있다”며 직권남용 범위를 상대적으로 넓게 판단했다. 직권의 범주를 형식적으로만 봐선 안 된다는 취지다. 이 전 실장 등은 이를 엄격하게 판단해야 한다며 검찰과 치열한 공방을 벌였지만 1심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판부는 이 같은 법리에 따라 헌법재판소 파견 법관을 통한 내부 기밀 수집, 한정위헌 취지의 위헌제청 결정 사건과 옛 통합진보당 국회의원·비례대표 지방의회의원 관련 행정소송에 대한 재판개입 등에 대한 일부 직권남용 혐의를 유죄로 판단했다.
검찰은 이번 재판을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 ‘수뇌부’를 단죄할 여지를 열어줄 계기로 보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재판부가 앞선 사법농단 관련 재판과 달리 직권남용 범위를 넓게 봤다”며 “사법부 윗선의 유죄 가능성을 높인 판결”이라고 평가했다.
구자창 기자 critic@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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