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사법행정권 남용에 가담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전직 고위 법관들이 처음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사법의 정치화가 인정된 것으로 사법 역사에 오점을 남기게 됐다. 이번 판결은 특히 사법농단 ‘몸통’인 양 전 대법원장,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등과의 공모 혐의가 사실상 인정됐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앞서 사법농단 관련 재판에서 6차례 연속 무죄 판결이 나오자 법조 주변은 물론 일반 국민도 “실체가 있기는 하느냐”며 의아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사법농단 자체에 대한 의구심과 함께 사법부의 ‘제 식구 감싸기’란 비판도 적지 않았는데, 이번 판결은 그런 우려를 씻어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2부(부장판사 윤종섭)는 23일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등 혐의로 기소된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에게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에게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각각 선고했다. 함께 재판에 넘겨진 나머지 2명에게는 무죄가 선고됐다.
이 전 실장은 국제인권법연구회 등 양 전 대법원장 시절 사법행정에 비판적인 판사들의 모임을 와해시키려 한 혐의 등이 인정됐다. 이 전 상임위원은 헌법재판소 내부기밀을 불법 수집하고, 옛 통합진보당 관련 소송 재판에 개입한 혐의다. 이들을 중심으로 이뤄진 사법농단이 실정법을 명백히 위반했다는 주장이 재판에서 받아들여진 것이다.
재판부는 양 전 대법원장 등과의 공모 관계도 사실상 확인했다. 이들은 양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전 대법관, 임 전 행정처 차장 등 사법농단 의혹 수뇌부에게 직보했던 인물들이다. 결국 이들에 대한 유죄 판단으로 양 전 대법원장 등 윗선의 유죄 가능성도 커진 상황이 됐다. 이에 따라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으로 기소된 양 전 대법원장의 재판에도 관심이 쏠린다. 지난 2월 공판을 마지막으로 한 달여간 멈춰 있던 양 전 대법원장 재판은 다음 달 재개된다.
검찰은 지난 1월 결심에서 사법농단 실체에 대해 “우리나라 사법부 독립을 무너뜨린 사건”이라고 밝혔다. 그런데도 2017년 2월 촉발된 사법농단 사태와 관련해 양 전 대법원장을 포함한 전현직 고위 법관 14명이 기소됐으나 지금까지 진행된 재판에서 이번 판결을 제외하고 모두 무죄가 선고됐다. 그간 ‘권한이 없으면 남용이 없다’는 면죄부 법리 구성으로 연루자들이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 계속 무죄를 받는 형국이 이어졌던 셈이다. 이번 판결을 계기로 상식이 통하는 법원의 정의로운 판단이 이어지길 기대한다.
[사설] 사법의 정치화 첫 유죄… ‘사법농단’ 단죄 마땅하다
입력 2021-03-24 0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