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 두 강대국은 치졸하게 싸웠다. 그 와중에 한국의 딱한 처지가 적나라하게 노출됐다. 조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후 처음 열렸던 미·중 고위급 회담에서 벌어진 일이다.
지난 18일 미국 알래스카 앵커리지의 캡틴 쿡 호텔. 미국 국무부가 공개한 회담 발언록 내용이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은 “나는 전 세계 거의 100명의 카운터파트들과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나는 방금 일본과 한국을 방문했던 첫 해외 순방을 마쳤다… 나는 중국 정부가 취한 일부 조치들에 대한 깊은 우려를 듣고 있다”고 중국을 자극했다.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발끈했다. 그는 “장관은 방문했던 두 나라가 중국의 강압에 대해 언급했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 나라들로부터 직접적인 불만이 나왔는지 알지 못한다. 단지 미국만의 시각은 아닌가”라고 따졌다.
초등학교에서나 있을 법한 대화가 미·중 외교장관 사이에서 오간 것이다. 외교적 수사를 지우고, 초등학생들의 화법으로 풀어 쓰면 이런 내용이다. 한 학생이 “나는 거의 100명의 애들하고 얘기를 나눴고, 방금 두 친구를 만났어. 걔네들한테서 니 뒷담화를 들었어”라고 말했다. 이러자 다른 학생이 “니가 만났다는 그 두 명한테 직접 들은 거 맞아? 그냥 니 생각 아냐?”라고 맞받아친 격이다.
블링컨 장관은 한국을 직접 지목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두루뭉술한 표현으로 중국을 비판하는 데 한국을 끌어들였다. 이에 왕이 부장은 한·일만 꼭 집어 그 두 나라들에서 불만이 나온 것이 맞느냐고 추궁했다. 블링컨 장관이나 왕이 부장이나 도긴개긴이다. 저잣거리 싸움에서도 제3자를 끌어들이는 건 치사한 수법이다. 하지만 미·중은 전 세계에 공개되는 대화에서 그런 짓을 서슴지 않았다. 심각한 외교적 결례다. 그러나 이것이 지금 한국의 현실이다. 특히 왕이 부장의 발언은 한·미를 갈라놓으려는 이간책 느낌을 준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지난 대선 기간 바이든을 ‘베이징 바이든’이라고 불렀다. 코로나19로 인해 더욱 거세진 반중 심리를 자극하기 위한 의도였다. 트럼프는 “바이든의 승리는 중국의 승리”라는 말도 했다. 그러나 바이든은 정반대로 가고 있다. 그는 트럼프가 했던 거의 모든 것을 지웠다. 하지만 대중 강경 노선은 이어가고 있다. 남는 장사이기 때문이다.
갤럽이 지난달 3∼18일 미국 성인 102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의 79%가 ‘중국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다’고 답했다. 갤럽이 1979년 중국에 대한 호감도 조사를 시작한 이후 최악이었다. 미국 조사기관 ‘퓨 리서치 센터’가 지난달 실시한 여론조사도 마찬가지다. 공화당 지지층에선 79%가, 민주당 지지층에선 61%가 ‘중국에 대해 부정적으로 느낀다’고 답했다. 중국을 싫어하는 데 여야가 없는 것이다. 바이든이 여론의 지지가 높은 정책을 포기할 가능성은 없다. 여기에 덧붙일 내용이 있다. 위에 언급한 갤럽 여론조사다. 미국인들이 중국보다 싫어하는 나라가 두 군데 더 있다. 비호감 1위 국가는 북한(89%)이고, 2위가 이란(85%)이다.
미국 편을 들면서도 중국을 자극하지 않겠다는 구상은 ‘양다리 걸치기’로 전락했다. 한국의 속내는 이미 ‘읽힌 패’다. 미·중 모두의 환심을 사려다가 둘 다에게 신뢰를 잃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운 형국이다. 대북 제재 완화를 시도하는 문재인정부는 바이든 행정부가 아니라 미국 여론과 싸워야 할 판이다. 미·중 고래 싸움에 ‘새우 등’ 처지보다 더 위태로운 형국에 내몰리고 있다. 나라 체면이 얼마나 더 땅바닥에 떨어져야 새로운 전략이 나올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워싱턴=하윤해 특파원 justi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