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서 재판받을 최초 북한인, 10년간 말레이 거주하며 中 왕래

입력 2021-03-23 04:04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주재 북한대사관 직원들이 21일(현지시간) 버스에 올라타고 있다. 말레이시아 당국이 북한인 문철명을 체포해 미국에 인도하자 북한은 외교 관계 단절을 선언했고, 말레이시아 정부도 이에 맞서 북한대사관 직원과 가족들에게 48시간 이내 떠날 것을 명령했다. AFP연합뉴스

미국 연방수사국(FBI)이 대북 제재를 위반한 혐의 등으로 말레이시아로부터 인도받은 북한 국적의 문철명(56)씨는 10여년간 말레이시아에 거주하며 사업상 이유로 중국을 자주 오갔던 것으로 전해졌다.

AP통신 등은 문씨가 미국 워싱턴에 있는 FBI 건물에 구금됐다고 21일 보도했다. 미 법무부는 이와 관련한 입장 표명을 거부하고 있는 상태다. 문씨는 2014~2017년 유엔의 대북 제재를 위반해 시계와 술 등 사치품을 북한에 보내고 유령회사를 통해 돈세탁을 한 혐의, 불법 선적을 지원하기 위해 위조 서류를 만든 혐의를 받고 있다.

말레이시아 언론 등에 따르면 문씨는 2008년부터 쿠알라룸푸르 외곽의 한 아파트에서 아내, 두 딸과 함께 거주해 왔다. 문씨는 최대 10년간 무직업 비자를 제공해주는 외국인용 장기체류 비자인 ‘말레이시아 마이 세컨드 홈’ 프로그램의 지원을 받아 정착한 것으로 전해졌다. 사업상 이유로 중국을 자주 오갔으나 사업 내용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워싱턴 연방법원 판사는 2019년 5월 2일 자금세탁과 공모 등 혐의로 문씨에 대해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문씨는 직후인 2019년 5월 13일 돈세탁과 대북 제재 위반 등 총 6건의 범죄 혐의로 말레이시아 사법 당국에 체포됐다.

미국의 북한 전문 매체 NK뉴스 등은 “문씨는 건강 악화와 가족 부양 등을 이유로 보석을 요구해 왔다”면서 “문씨 아내는 암투병 중”이라고 전했다. 다만 현지 법원은 도주 우려와 외교적 민감성을 이유로 이를 기각했다.

말레이시아 법원은 2019년 12월 미국 인도를 승인했지만 문씨 측은 신병 인도 거부를 요청했다. 이달 초 말레이시아 대법원은 문씨의 상고를 기각하고 인도를 결정했다.

AP통신 등 외신들은 “문씨는 미국에서 재판을 받게 될 최초의 북한 사람”이라면서 “문씨 변호인은 문씨가 미국 내에서는 공정한 재판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서남아시아 지역에서의 북한 공작활동을 약화시키려 한다”고 분석했다.

문씨 측은 미국으로 신병이 인도된 것은 북한의 미사일 프로그램에 압력을 증대시키려는 정치적 목적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상황이다. 북한 당국과 문씨는 “터무니없는 날조이고 완전한 모략”이라며 모든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북한은 말레이시아 대법원이 문씨를 미국에 인도하기로 결정하자 말레이시아와의 외교 관계 단절을 선언했다. 북한 외무성은 지난 19일 발표한 성명에서 “이번 사건은 미국의 극악무도한 적대시 책동과 말레이시아 당국의 친미 굴욕이 빚어낸 직접적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북·미가 새로운 대화 돌파구를 찾지 못하는 상태에서 돌발변수로 등장한 문씨 문제는 북·미 관계에 악재로 작용할 것으로 전망된다. AP통신은 “북한이 바이든 행정부에 북·미 대화 교착 상태에 대해 압력을 증대하면서 북·미 사이의 적대감이 증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문씨가 미국에 전격 송환되면서 북한의 대외활동이 크게 위축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북한 외교관 출신인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은 22일 국민일보와 통화에서 “북한 당국은 이번 사건과 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대북 제재를 위반한 인물들을 조용히 북한으로 불러들일 것”이라며 “대신 북한 국적이 아닌 이들을 내세워 불법거래를 계속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워싱턴=하윤해 특파원, 김지훈 손재호 기자 justi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