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부터 정부가 편성한 예산안의 국회 삭감 관례가 번번이 깨지고 있다. 정치권이 코로나19 상황이 심각하다는 이유로 심사 막바지에 지출을 늘린 탓이다. 올해 1차 추가경정예산(추경)안도 정부 안을 크게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당분간 이런 흐름이 이어진다는 가정 하에 예산당국이 야심차게 마련한 한국형 재정 준칙을 지키려면 차기 정부 때 상당한 재정 긴축 계획을 세워야 할 수도 있다. 현 정부의 퍼주기가 고스란히 1년 후부터 국가 경영에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의미다.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는 22일 조정소위를 열고 본격적인 심사에 돌입했다. 당초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추경안은 19조5000억원 규모였으나, 이미 상임위에서 3조9000억여원 가량이 증액됐다. 예산을 가장 크게 늘린 곳은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1조6926억원)다. 농민과 어민에게도 가구당 100만원씩 재난지원금을 지급하기 위해서다. 문화체육관광위원회는 헬스트레이너 지원을 위해 2459억원을 늘렸고,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도 소상공인 전기료 감면 기간을 3개월에서 6개월로 늘리기 위한 예산 등 총 6199억원을 증액했다.
통상 추경안을 포함한 정부 예산안은 국회 심의 과정에서 정부안보다 삭감되는 것이 관례였다. 야당 등에서 방만 재정 등을 문제삼으면서 정부가 짠 예산 규모가 소폭이나마 감소하곤 했다. 하지만 코로나19가 닥친 지난해부터는 정반대 상황이 벌어지는 중이다. 지난해 2차 추경 당시 1차 재난지원금 대상이 전 국민으로 확대되면서 증액된 바 있고, 본예산을 편성할 때도 3차 지원금을 포함시키며 11년 만에 증액 예산이 국회에서 의결됐다.
코로나19가 종식되기 전까지는 국회 증액이 일상화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김소영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선별 지원이라면 무엇보다 효율적으로 재원을 사용해야 하는데, 지금은 지원 타깃과 목표가 불명확하다”며 “지금 예산을 많이 써야 한다면, 코로나19 상황이 끝난 뒤 부채를 어떻게 줄이겠다는 이야기라도 해야 하는데 그마저도 없다”고 지적했다.
전 농어업인에게 보편적 재난지원금을 지급하는 것 등은 ‘선거용 돈뿌리기’라는 지적도 거세다. 양준모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치권이 선거가 코앞이니 예산을 깎자고 달려들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정부 지출이 예상보다 늘면서 중기 재정 계획에도 비상이 걸리고 있다. 기획재정부는 지난해 10월 한국형 재정준칙을 2025년부터 적용한다고 발표했다. 관련 법안은 아직 국회에 계류 중이지만, 기재부는 도입을 약속했기 때문에 원칙을 중기 계획에 반영할 수밖에 없다. 재정 준칙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 60%, 통합재정수지 비율 -3%를 분모, 현재 재정 상태를 분자에 반영한 후 합산한 숫자가 1.0 이하가 되도록 했다. 그런데 정부 곳간은 벌써 올해 본예산(558조원)을 마련하면서 재정 준칙 한도에 육박한 상태다.
이에 기재부는 2022~2024년 서서히 지출을 줄이는 중기 계획을 세웠다. 그래야 2025년 재정 준칙 한도를 맞출 수 있다. 하지만 올해가 시작되자마자 추경을 편성해 재정 상태가 더 나빠졌다. 본예산 대비 국가채무비율은 0.9% 포인트, 통합재정수지비율은 -0.8% 포인트 조정됐다. 각각 48.2%, -4.5%가 되면서 아예 재정 준칙 한도(1.0)을 넘어버렸다. 이 같은 상황에서 국회는 추경 총량까지 늘리고 있다. 아울러 2022년도 대통령 선거와 코로나19 대응 등으로 당초 지출 증가 계획(6.0%)도 틀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에 2025년 재정 준칙 도입은 사실상 어려워지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2022~2024년 더욱 가파르게 지출을 줄이고, 수입을 늘려야 한도를 겨우 맞출 수 있어서다. 이 경우 2023~2024년에 GDP 성장률, 세수 탄성치 등에 무리한 숫자가 제시 될 수도 있다.
한 민간 연구소 관계자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지출이 꾸준히 늘어나 재정 준칙 한도를 훌쩍 넘을 것”이라며 “2025년 재정 준칙 도입에 맞추려면 2022~2024년 중기 계획을 대폭 수정해야 해 정부의 고민이 클 것”이라고 말했다.sgjun@kmib.co.kr
세종=전슬기 신재희 기자 sgj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