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일 중 3일은 가게에 아무도 안 옵니다.”
지난 18일 오후 서울 성동구에서 20년째 수제화를 만들고 있는 유홍식(73)씨의 7평 남짓한 가게 안은 명성과 달리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다. 성수동 카페를 찾은 시민들로 수제화 거리는 붐볐지만 유씨의 가게는 세상과 단절된 듯 고요했다. 주인을 기다리며 진열장을 가득 메운 수제화 뒤로 유씨와 문재인 대통령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유씨는 성동구청에서 인증한 ‘성동구 수제화 명장 1호’ 인물이다. 수제화 명장 인증패를 받은 2013년 이후 2017년에 역사적인 판문점 회담을 앞두고 문 대통령의 수제화를 직접 제작하면서 유명세를 탔다. 유씨는 문 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을 자랑스럽게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가게가 잘나가던 때는 하루에 25켤레를 팔아 1400만원의 매출을 달성했을 정도”라고 회상했다.
하지만 영광의 순간은 그리 길게 가지 못했다. 약 3년 전부터 수제화 공장이 들어섰던 곳에 ‘창고형 카페’가 속속 입점하면서 근방의 자릿세를 급격히 끌어올렸다. 지불능력이 없는 영세 수제화 가게는 뚝섬이나 군자교 인근으로 밀려났다. 유씨 역시 지난해 월세가 650만원까지 치솟자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고 임대료와 가게 면적 모두 절반 수준인 지금의 점포로 쫓겨나다시피 이사를 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19 사태까지 터지면서 수제화 거리는 급격히 무너졌다. 코로나 직전 250개 수준이던 성수동 구두 공장은 1년 만에 180여개로 줄어들었다. 유씨는 “감염병 때문에 기업 행사 등이 줄어들면서 구두 수요도 함께 떨어졌다”고 설명했다. 가계경제까지 얼어붙다 보니 ‘나만의 수제화’를 고집하던 ‘큰손’ 고객들도 등을 돌렸다고 한다.
주변에서는 수제화 거리 한복판을 지키고 있는 노년의 장인에게 ‘이제 그만 가게를 접으라’는 권유를 수차례 건넸다고 한다. 그럴 때면 유씨는 장인이라는 자부심 하나로 버텼다고 했다. 그는 “직접 만든 수제화를 신은 문 대통령이 북한을 넘어갔던 그 장면을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벅차고 설레 이 일을 그만두기 어렵다”며 “하지만 그럴수록 인근 구두공들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떠나는 현실이 한스럽다”고 전했다.
국민일보가 지난 16~18일 사흘간 돌아본 성동구 수제화 거리는 코로나19 직격탄을 맞고 침울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장인이라 불리며 수많은 고객을 거리로 끌어모으던 이들조차 급락한 매출 감소를 이기지 못하고 하나둘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한평생을 바친 구두업을 요식업으로 바꿔 갈 정도로 생계가 절박한 이들도 목격됐다.
또 다른 성동구 수제화 장인 전태수(68)씨는 영부인 김정숙 여사의 수제화를 만들어준 사람이다. 그의 가게는 3평 남짓한 규모지만 코로나 직격탄으로 임대료조차 내기 버거운 장소가 돼버렸다.
그는 “일부 점포만 단골 고객 덕분에 버티고 있을 뿐 나머지는 앞길이 막막한 상태”라고 한숨을 쉬었다. 그는 지난해 월평균 200만원 정도의 매출을 올렸다. 가죽 재료값이나 임대료 비용을 고려하면 월 1000만원 이상 손해 본 것이라고 한다.
전씨는 50년 구두공 인생에서 지난해 처음 빚을 내봤다고 했다. 1년만 버티면 어떻게든 불황을 이겨낼 수 있다는 희망을 걸었던 것이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코로나19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그는 “지난해 신용보증재단을 포함해 끌어올 수 있는 대출은 다 받았지만 이제는 한계가 왔다”고 하소연했다.
전씨는 친하게 지내던 한 후배 구두공의 안타까운 사연도 소개했다. 후배가 6000만원을 투자해 신발 제작 공장까지 세운 적이 있었는데 지난해 말 결국 가게를 폐업하게 됐다는 것이다. 후배가 공장을 정리하고 남은 것은 기계에서 나온 고철값과 구두 떨이값 300만원이 전부였다고 한다. 전씨는 “폐업을 하면 재고로 남은 원가 10만원짜리 구두는 5000원에 팔린다”고 전했다.
1998년부터 수제화 공방을 운영하는 A씨(62)는 정부가 차라리 폐업 지원금 지급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폐업에 들어가는 각종 비용이 없어 강제로 산소호흡기를 차고 있는 수제화 가게를 정리하는 것이 그들의 고통을 그나마 덜어주는 길이라는 것이다.
A씨에게도 영광의 순간은 있었다.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하루 매출 1000만원은 기본이었고 가장 많은 날은 3000만원까지 벌어본 적이 있다. 하지만 온라인 시장의 가격 ‘후려치기’ 공세에 더해 지난해 거리두기가 본격화됐던 8월부터는 반 토막 난 매출이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수제화 거리의 몰락은 고스란히 가죽 재료 납품업체의 부담으로 이어졌다. 20년간 수제화 거리에서 가죽 사업을 이어온 50대 B씨는 최근 자존심까지 버려가며 사무실 한쪽을 식당으로 바꾸는 결정을 내렸다.
B씨는 “한때 우리도 명품을 만드는 ‘구두장이’라고 불리며 자부심을 갖고 일하던 시절이 있었다”며 “하지만 이제는 성수동 수제화 거리라는 명칭도 사라져야 하는 시기가 온 것이 아닌가 싶다”고 고개를 떨궜다.
글·사진=최지웅 이한결 기자 woo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