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광동 (4) 헛헛함에 펼친 성경에… “일어나라 함께 가자” 말씀이

입력 2021-03-22 03:05
김광동 대표가 외교관 초창기이던 1979년 벨기에 브뤼셀의 중심 광장인 그랑플라스에 서 있다.

1990년 주유럽공동체(EC)대표부 참사관으로 벨기에 브뤼셀에 부임했다. 독일이 베를린장벽을 허문 이후 공식적으로 통일을 선언하고 유럽 22개국이 프랑스 파리에서 재래식무기감축조약(CFE)에 서명한 해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반세기 동안 옭아매던 냉전이 사실상 종식됐다. 그해 8월 대한민국은 소련과 국교를 맺었다. 12월엔 노태우 대통령이 모스크바를 방문해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2차 정상회담을 했다. 북방외교로 분주하던 그해 나는 모스크바에 급파돼 국빈 방문 행사를 천신만고 끝에 성공적으로 마치고 크리스마스 무렵 브뤼셀로 귀임했다.

돌아와 보니 아내와 아이들이 개척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20명 남짓 출석하는 작은 교회라 우리 가족이 나가지 않으면 전 교인의 4분의 1이 빠지는 셈이었다.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기는 했지만, 예배가 영 낯설었다. 교회는 의지가 약한 사람들이 다니는 곳이라 여겼기에 멋쩍어서 내내 멀뚱거렸다.

모교인 연세대학교가 미션스쿨이므로 기독교 관련 필수 학점을 이수하고 채플에도 참석했지만, 워낙 건성건성 했던 탓에 특별한 기억은 없었다. 어머니가 성당을 다니셔서 나도 성당을 다니는 척했기 때문에 교회는 절대로 안 다닌다고 그때는 생각했다.

사실 이때는 주말과 휴식 없이 수년째 진행된 과도한 업무로 심신이 고갈된 시기였다. 재충전하고자 부임할 때 가져온 교양 철학 문학 서적을 탐독했지만, 마음의 갈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운동도 열심히 하고 충분한 휴식을 하며 건강관리를 했지만, 가슴에 구멍이 뚫린 듯 스산한 바람이 지나가고 삶이 무의미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가을이 되자 우울감이 더 심해졌는데 어느 날 아침 출근해 대표부 사무실에서 누군가가 꽂아둔 성경책을 발견했다. 성경에는 과연 뭐가 있을까 해서 마태복음부터 읽기 시작했다. 누가 누굴 낳고 누굴 낳는다는 이야기로 시작해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 그리스도가 귀신을 쫓고 병든 자를 고치고 알아듣기 어려운 말씀을 했지만, 어쨌든 계속 읽어 나갔다.

그러던 중 마태복음 26장 36절에 이르렀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직전 제자 세 명과 겟세마네로 가서 간절히 기도하는데, 제자들은 쿨쿨 자는 내용이었다. 이윽고 46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일어나라 함께 가자”고 말씀하신다. 그때 귀에서 고막이 터질 듯한 폭발음이 들렸다.

군복무시절 좁은 사무실에서 권총 오발 사고를 낸 적이 있다. 총알이 장전된 줄 모르고 벽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가 ‘빠앙~’하고 귀를 찢는 총성과 함께 하얀 페인트 가루가 사무실 가득 날렸다. 다친 사람 없이 잘 넘어갔지만 아찔한 경험이었다. 그때와 똑같은 체험을 마태복음의 이 말씀을 읽으며 느꼈다. 깜짝 놀라 방금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나중에 보니 에베소서 5장 14절처럼 잠자는 자를 깨워 주님께 인도하는 말씀이었다.

정리=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