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너 좋고 인간적인 ‘알파고’도 가능할까

입력 2021-03-18 19:29 수정 2021-03-18 19:59
인간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소셜 로봇’은 의료시설뿐만 아니라 관공서, 기업, 가정 등으로 그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인간과의 접촉면이 넓어짐에 따라 로봇의 사회적, 정서적 지능도 중요해지고 있다. 감성 인공지능(AI) 기업 어펙티바(Affectiva)는 소셜 로봇 ‘페퍼’ 제조사와 제휴해 로봇의 정서적 능력을 확장하도록 연구 중이다. 페퍼가 지난해 6월 그리스 아테네국제공항에서 승객들에게 코로나19 관련 조치를 안내하고 있다. 신화뉴시스

5년 전, 2016년 3월 12일 ‘세기의 대결’ 세 번째 대국을 복기(復棋)해 보자. 내리 두 판을 내준 이세돌이 알파고와 맞대결을 하던 중 화장실에 가기 위해 일어섰다. 이세돌이 자리를 비웠지만 알파고는 자신의 수를 뒀고, 인공지능(AI)의 손이 된 아자 황도 무심하게 흰 돌을 놓았다. 이를 본 현장 해설자는 농담처럼 말했다. “매너가 없네요. 보통 화장실 갔다 오면 착점하는 게 예의인데, 바둑이 예와 도의 게임인데 알파고 때문에 그런 게 많이 없어졌어요.”

알파고의 무례함(?)을 섞은 무심함은 대결 내내 계속됐다. 대국 중은 물론이고, 이겨도 반응이 전무했다. 이는 돌을 놓은 아자 황의 무표정과 맞물리며 알파고라는 존재를 더욱 강력하게 보이게 했다. 유일하게 패한 네 번째 대국에서도 ‘AlphaGo resigns’라는 팝업창만 띄웠다. 반면 대국에서 온갖 표정을 짓고 손을 계속 움직였던 이세돌은 감정이 풍부한 인간이었다. 그는 1승의 기쁨을 웃음과 함께 표현했다. “3연패를 하고 1승을 하니까 이렇게 기쁠 수가 없습니다.”

감정을 읽는 기계의 탄생
2018년 4월 어펙티바 설립자이자 최고경영자인 라나 엘 칼리우비가 자사의 표정 인식 기술을 직접 시연하는 모습. AP뉴시스

만약 ‘걸 디코디드(Girl Decoded)’의 저자 라나 엘 칼리우비가 알파고 개발에 관여했다면 알파고는 바둑의 “예와 도를” 갖추고 좀 더 인간적으로 반응해주지 않았을까 싶다. 이집트 출신의 미국인 칼리우비는 ‘감성 AI(Emotion AI)’ 시장을 개척한 ‘어펙티바(Affectiva)’의 설립자이자 최고경영자(CEO)다. 감성 AI는 디지털 세계에 감성 지능을 도입하는 것을 목표로, AI가 인간의 감정을 인식한 후 대응할 수 있도록 하는 컴퓨터과학의 한 분야다. 애플, 마이크로소프트를 비롯해 포춘 글로벌 500대 기업 중 25%가 어펙티바의 기술을 활용할 정도로 그 적용 범위를 넓혀가는 중이다.

책은 칼리우비의 첫 에세이로 그의 일과 삶을 씨줄과 날줄로 엮는다. 먼저 그의 연구 여정은 컴퓨터에 인간의 감정을 이해시키는 과정이나 마찬가지였다. 코딩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두각을 나타내는 이집트 대학생이었던 그는 결혼 상대가 권한 책 한 권을 읽고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MIT 미디어랩 부교수 로절린드 피카드가 쓴 ‘감성 컴퓨팅’은 칼리우비에게 새로운 컴퓨터과학의 문을 열어젖힐 열쇠와 같은 의문을 남겼다. “감정이 뇌 기능에 있어서 본질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 왜 컴퓨터의 두뇌를 모형화하는 것은 구시대적 지성의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을까?”

칼리우비가 주목한 것은 얼굴이었다. 컴퓨터가 인간의 감정을 식별하고 수량화하고 반응하려면 인간의 얼굴을 이해시키는 것이 급선무라고 봤다. 그는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박사과정을 밟으며 연구를 이어갔다. 하지만 기계에 얼굴을 이해시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가령 칼리우비의 첫 표정 학습인 ‘머리를 끄덕이는 표현’은 만족스런 결과를 얻기까지 1년 반이 걸렸다. 인간이 바로 아는 것도 컴퓨터는 하나하나 입력해야 했기 때문이다. 머리를 끄덕이는 속도와 횟수에 따라 인간은 그 의미를 바로 알아채지만 컴퓨터는 그렇지 못했다. 첫 성공은 다음 성공으로 이어졌다. 칼리우비는 자신에게 큰 영향을 준 피카드를 만난 후 그를 따라 MIT 미디어랩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이후 공동으로 어펙티바를 설립하는 데 이른다.

현재 어펙티바의 감정을 이해하는 AI 기술은 자살 징후를 조기 발견하는 앱, 자폐증이나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가 있는 이들이 사회적 감정 기술을 익히는 게임형 앱, 안면 재건술 후 표정 측정 도구, 표정 변화 파악을 통한 파킨슨 병 조기 진단 등에 활용되고 있다. 사회적·정서적 지능을 가진 ‘소셜 로봇’이 인간과 신뢰를 형성하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즐거움, 분노 같은 기본적인 감정은 물론이고 미소와 쓴웃음의 차이처럼 복잡한 감정 변화를 이해시켜 인간 기분에 따라 달리 반응하도록 연구 중이다. 2016년 미국 대선 후보 토론에선 힐러리 클린턴과 도널드 트럼프의 표정을 분석하는 데도 사용됐다. 운전자의 감정 상태와 전방 주시 여부 같은 것들을 확인해 자동차 안전을 높이는 방안 등도 감성 AI의 활용 분야다.

‘착한 이집트 소녀’의 성장기

이슬람 출신 여성의 성장담은 책의 다른 한 축이다. 대학을 열다섯에 입학할 정도로 뛰어났던 칼리우비에게 가족은 새로운 기회를 열어 준 든든한 배경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중동의 여성 컴퓨터 프로그래머 첫 세대였다. 이집트에서 직업을 가진 어머니가 흔치 않았던 상황을 감안하면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가정에서 자랐던 셈이다. ‘어차피 시집을 갈텐데, 뭐 하러 좋은 학교에 보내는 데 돈을 쓰냐’고 핀잔을 주는 친척들에 아랑곳하지 않고 저자 포함 세 자매를 사립학교에 보낸 것도 어머니였다.

22살에 결혼한 후 영국에서 박사학위를 밟을 수 있었던 데는 남편의 도움도 컸다. 남편은 해외에 있는 학교에 지원해 가능성을 키우라고 독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저자가 MIT 미디어랩에서 박사 후 과정을 밟기 시작하면서 가족과 틈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집트에서 교수를 했으면 하는 부모님도 있었지만 결혼 생활이 더 큰 문제였다. MIT행을 반기지도 반대하지도 않았던 남편은 저자가 어펙티바를 창업한 후 폭발했다. 남편을 이혼을 원했고, 부모님은 결혼 생활이 위기를 맞은 책임을 저자에게 돌렸다. 양가 부모는 해결책으로 저자에게 ‘더 나은 아내’가 되도록 주문했다.

저자를 특히 힘들게 한 건 회사를 팔거나 사임하라는 아버지였다. “똑같은 규칙이 남자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난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와엘(남편)에게 회사를 그만두고 보스턴으로 이사하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왜 그렇게 하면 안 되지? 사회에 나온 이후 모든 걸 쏟아부어 만든 회사를 떠나라고 하는 아버지의 말씀에 난 깊이 상처를 입었다.” 상처를 봉합하지 못한 부부는 각자의 길을 걷는다. 칼리우비는 두 아이와 함께 미국행을 택한 후 미국으로 귀화했고, 회사 CEO로도 올라선다.

책은 ‘착한 이집트 소녀’로 감정을 숨겼던 저자가 컴퓨터에 인간의 감정을 이해시키며 스스로 변하는 모습을 한 편의 소설처럼 그린다. 더불어 감성 AI를 활용하는 기술의 현주소도 확인할 수 있다. 칼리우비는 컴퓨터에 감정을 이해시키는 것은 결국 더 나은 인간이 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책 후반 데이터 수집의 투명성, 윤리적인 AI 활용을 강조하며 중국을 비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저자는 변화가 가져올 미래를 낙관하며 책을 마무리한다. “내 아이들과 어펙티바의 미래를 생각하면 내 머릿속에는 연민과 이해심으로 가득 찬 세상이 떠오른다. 지구 곳곳에 사는 사람들은 기술을 통해 소통하면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보다 서로를 더 배려하고, 더 나은 인간이 되어 갈 것이다.”

김현길 기자 h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