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앞 與 누구도 사과 안해… 진심으로 잘못 인정 땐 용서”

입력 2021-03-18 04:05
서울 중구 명동의 한 호텔에서 17일 열린 ‘서울시장 위력 성폭력 사건 피해자와 함께 말하기’ 기자회견에서 박원순 전 시장 성폭력 사건 피해자의 자리가 마련돼 있다. 피해자는 “비난의 화살을 제게 돌리는 행위를 이제 멈춰 달라”고 호소했다. 사진공동취재단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사건 피해자가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해당 사건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정치인들에게 진정한 사과를 요구했다. 피해자 A씨는 “진심으로 잘못을 인정한다면 모두 용서하고 싶다”며 “비난의 화살을 제게 돌리는 행위를 이제 멈춰 달라”고 호소했다.

A씨와 지원단체 한국여성의전화·한국성폭력상담소 등은 17일 서울 중구 퇴계로 티마크그랜드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피해자가 직접 나와 발언한 것은 박 전 시장 사망 252일 만에 처음이다.

마스크를 낀 채 입장한 A씨는 자리에 앉아 발언문을 읽었다. 차분히 말을 이어갔으나 긴장된 듯 중간중간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내쉬었고 떨리는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박 전 시장의 극단적 선택을 언급할 때는 눈물을 쏟아냈다.

A씨는 “고인의 극단적 선택으로 가해자와 피해자의 자리가 바뀌었고, 고인을 추모하는 거대한 움직임 속에서 나 같은 인간은 설 자리가 없다고 느꼈다”며 당시 심정을 밝혔다. 그는 “고인의 방어권 포기로 인한 피해는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며 “분명한 사실은 이 사건의 피해자는 시작부터 끝까지 저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A씨는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있음에도 이 사건에 일언반구도 없는 정치인들의 모습에 나서게 됐다고 기자회견을 연 계기를 설명했다. 성추행 사건이 서울시장 선거를 촉발했으나 유력 후보들을 비롯해 더불어민주당 정치인 누구도 사과하지 않아 그 의미가 퇴색되고 있다는 것이다.

A씨는 “제게 상처를 준 사람이 선거캠프에 다수”라며 “상처를 준 정당에서 시장이 선출됐을 때 저의 자리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든다”고 했다. 그는 “몇몇 의원은 ‘피해 호소인’이라는 말로 사실을 왜곡했고 (피소 사실을 유출한) 남인순 의원에게 받은 상처는 회복이 불가능한 지경”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낙연 대표와 박영선 후보가 사과한다고 했지만 어떤 것에 대한 사과인지 명확히 짚지 않았고 당 차원의 조치는 아무것도 없다”며 “피해 호소인이라는 용어로 사실을 왜곡한 의원들을 징계하고 남 의원에 대해서는 (의원직) 사퇴를 요구한다”고 강조했다.

A씨는 “잔인한 2차 가해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며 “일상으로 돌아가 당당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피해자가 에둘러 불편함을 호소하기보단 가해자가 스스로 조심하는 사회가 됐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박 전 시장은 지난해 7월 8일 강제추행·성폭력처벌법 위반 혐의로 피소됐으며 이틀 뒤인 10일 서울 북악산 숙정문 일대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은 박 전 시장 성추행 의혹과 관련해 5개월간 수사를 벌였지만 이를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 1월 25일 직권조사를 마무리지으며 ‘성희롱에 해당한다’는 결론을 냈다. 국민일보가 이날 입수한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희롱 등에 대한 직권조사’ 59쪽짜리 결정문에 따르면 피해자가 주장한 다수의 성추행 사실이 인정됐다. 인권위는 결정문을 지난주 피해자에게 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결정문에 따르면 박 전 시장이 피해자에게 한밤 중 “혼자 있냐, 집에 갈까” “뭐해? 향기 좋아 킁킁” 등의 메시지를 보낸 정황이 포착됐다. 오침시간 집무실에 박 전 시장을 깨우러 간 피해자에게 안아 달라고 하는 등 신체적 가해행위를 한 사실도 밝혀졌다.

강보현 기자 bob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