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외교관으로서 첫 임지인 중앙아프리카공화국으로 떠났다. 첫 아이를 갓 출산한 아내와 함께 갈 만한 곳이 못 돼 할 수 없이 혼자 떠났다. 석 달 뒤 아내가 생후 90일 된 딸아이를 데리고 합류해 열흘 뒤 백일잔치를 해줬다. 별 탈 없이 건강하게 자라나 준 딸이 늘 고맙고 애틋하다.
외국에서 장기 체류한 건 처음이라 적응하는 데 애를 먹었다. 고생한 기억밖에 없어서 내게 아프리카는 다시 밟고 싶지 않은 땅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는 그때부터 나를 향한 큰 계획이 있으셨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78년 2월 주벨기에 대사관 2등서기관으로 전임했다. 열악한 환경의 아프리카에서 1년을 보낸 딸 아이는 서울 처가에 맡기고, 아내와 함께 벨기에 브뤼셀에 도착했다. 딸이 늘 눈에 밟혀 데려오려 했지만, 당시 2등서기관의 박봉으로는 서울을 왕복할 비용이 만만치 않아 장인 장모님이 딸과 함께 브뤼셀로 와주셨다. 덕분에 1년 만에 반갑게 합류할 수 있었다. 둘째인 아들은 브뤼셀에서 태어났다.
아내는 갓 난 아들과 세 살 된 딸을 홀로 키우느라 무척 힘든 시간을 보냈다. 당시 나는 대사관으로 밀려드는 수많은 업무를 처리하고 일과 후에는 여러 모임을 하느라 집안을 돌보지 못했다. 아내에겐 늘 미안한 마음이다.
당시 주변 환경은 그리 좋지 않았다. 78년 4월 프랑스 파리를 이륙해 김포국제공항으로 운항하던 대한항공 902편이 항법장치 이상으로 소련 영공에 들어가자 소련 전투기가 미사일을 쏴 날개가 파손된 채 호수에 불시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승객 109명 중 2명이 사망했다. 83년 소련 전투기의 공격으로 대한항공 007편 승객과 승무원 269명 전원이 사망한 만행에 앞서 벌어진 일이었다. 소련과 국교가 없었기에 미국이 대리로 협상에 나서 생존 승객을 귀환시키는 등 외교적으로 분주한 때였다.
79년엔 박정희 대통령 피살 사건, 신군부의 12·12 쿠데타 등이 일어났다. 80년 서울에 돌아와 근무한 지 얼마 안 됐는데 당직 근무 중 군검열반 소령과 말다툼을 벌인 일이 있었다. 흉흉한 시국에 군부세력에게 눈총받을 만한 일을 했으니 신변을 보장할 수 없었다. 때마침 프랑스 국제행정대학원(IIAP)에서 공부할 기회가 생겨 파리로 떠났다. 81년부터 83년까지 그곳에서 국제관계학을 공부했다.
84년엔 스위스 주제네바 대한민국 대표부 참사관으로 부임했다. 인권 난민 교역 등을 다루는 유엔전문기구를 상대하는 재외공관이었다. 87년엔 본국에 귀임해 외무부에서 경제협력과장 통상기구과장 의전과장을 역임했다. 의전과장 시절엔 청와대 외교사절 관련 실무를 맡아 휴일이 거의 없을 정도로 고되게 일했다. 90년 주유럽연합(EU) 대표부 참사관으로 브뤼셀에 부임해 개척교회에 나가면서 삶의 변화가 찾아왔다.
정리=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