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이 제63회 그래미 어워즈에서 '베스트 클래식 기악 독주' 상을 수상했다. 2017년 이맘때쯤, 일하는 출판사에서 발행하는 문학잡지 '릿터' 에 용재 오닐 인터뷰가 수록됐다. 문학잡지인 만큼 그의 예술과 예술에 깃든 문학에 집중된 대화였다. 수상 소식을 듣자마자 그 인터뷰를 들춰 봤다. 4년 전에는 심상하게 스쳤던 단어와 문장들이었는데 수상소식 때문일까, 어떤 단어와 문장도 평범하게 보이지 않았다.
용재 오닐은 예술을 재해석이라고 정의했다. 뚜렷한 주제가 있고, 그 주제가 끊임없이 변형되는 일종의 변주곡, 말하자면 오리지널한 테마를 반복하는 행위. “모두를 경험한 후에 비로소 완성되는 하나의 여행이자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가 예술이 아니겠냐고 그는 말하고 있었다. 예술은 재해석이라는 말에 나도 공감한다. 그것도 아주 깊이. 예술에 대해 우리가 합의할 수 있는 유일한 단어가 있다면 재해석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만큼.
‘그들은 결국 브레멘에 가지 못했다’는 그림형제가 1800년대에 쓴 동화 ‘브레멘 음악대’를 재해석한 작품이다. 원작을 재해석하는 책은 그 자체로 특별한 뉴스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많은 작가들이 어떤 작품을 다시 쓴다. 작품은 인생과도 같아서 누군가의 삶을 그리고 싶은 것처럼 어떤 작품을 주인공으로 삼고 싶기도 한 것이다. 그럴 때 원작은 두 가지 방식으로 다시 쓰기의 대상이 된다. 여전히 유효한 세계를 보여 주기 위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세계를 보여 주기 위해.
비틀어진 제목에서도 눈치 챌 수 있듯이 루리의 ‘그들은 결국 브레멘에 가지 못했다’는 후자에 가깝다. 그림형제의 시대에 도달할 수 있었던 브레멘은 루리의 시대에 이르러 불가능한 도착지가 되었다. ‘브레멘 음악대’에서 가장 상징적인 장면이라면 동물 네 마리가 서로의 어깨를 밟고 올라가 탑을 만든 모습일 것이다. 그들 각자는 왜소하지만 서로의 어깨 위에 올라선 그들은 거인의 형상이 된다. 거인이 된 그들은 도둑을 물리치고 빈집을 차지한다. 그러나 협력해서 거인이 될 수 있었던 상생의 수직은 2021년 버전의 브레멘 음악대에 이르러 공허한 수평의 이미지로 위축된다. 그들은 지하철에 나란히 앉아 있거나 밥상을 사이에 두고 도둑과 마주 앉아 있다. 기를 쓰며 열심히 살아도, 누군가 번 돈을 훔치고 살아도, 누구랄 것 없이 가난하다. 지독한 가난만이 평등을 허락한다.
루리의 재해석은 ‘브레멘 음악대’ 독자로서 루리의 생각을 보여 준다. 재해석은 독자로서의 작가이자 작가로서의 독자를 보여 주는 흥미로운 글쓰기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에세이 ‘글쓰기에 대하여’를 읽었다. 글쓰기, 또는 작가가 된다는 것을 주제로 한 여섯 번의 강의를 묶은 이 책은 애트우드가 읽은 것, 읽으며 생각한 것, 생각하며 쓴 것, 쓴 다음에 알게 된 것, 알게 되며 폐기한 것, 그리고 다시 읽은 것들이 빙글빙글 돌아가며 글쓰기와 글쓰기를 업으로 삼는 행위의 본질을 들춰낸다. 펼쳐서 보여 주지는 않고 그야말로 살짝 들춰 조금씩 보여 준다. 따라서 글쓰기에 필요한 필살기를 전수받고 싶은 독자라면 일찌감치 다른 책으로 시선을 돌리는 게 낫다. 이 책은 독자로서의 애트우드가 어떤 작품을 어떻게 재해석했는지에 더 관심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글쓰기에 대하여’는 독자로서의 애트우드와 작가로서의 애트우드가 교차하는 지점에 놓여 있다. 그리고 그 교차야말로 글쓰기의 핵심이라는 게 이 책의 핵심이다.
애트우드는 작가와 독자, 그리고 매개체로서의 책을 ‘영원한 삼각관계’라고 표현한다. 그러면서 한 가지 일화를 소개하는데, 그의 대학 은사님이 말하길 어떤 작품에나 공통적으로 던질 수 있는 진짜 질문이 딱 하나 있다는 것이다. ‘그 작품이 살아 있는가, 아니면 죽어 있는가.’ 살아 있는 것은 성장하고 변화하며 자손을 낳고 죽은 것들은 어떤 활동성도 띠지 않는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작품은 성장하고 변화하는 텍스트다. 그런데 성장하고 변화하는 텍스트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작가와 독자의 상호작용 안에서 만들어진다. 작품은 작가가 쓰지만, 작품이 살아 있기 위해서는 독자와 작품이 소통해야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재해석의 방식으로.
삼각관계라면 일단 피하고 싶다는 생각부터 들지만 읽고 쓰는 세계에 들어온 이상 애트우드가 말하는 ‘영원한 삼각관계’를 피할 길은 없어 보인다. 좋아하는 작품을 계속 살게 하기 위해 재해석하는 우리는 모두 텍스트의 영원을 꿈꾸는 낭만주의자일지도 모른다. 물론 나는 이 낭만주의를 위한 복무에 조금의 불만도 없다.
박혜진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