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제이콥과 모니카

입력 2021-03-20 04:07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엔 바퀴 달린 허름한 집과 허허벌판이 있다. 아내 모니카(한예리)의 표정은 심상치 않다. 남편 제이콥(스티븐 연)은 한 줌 푹 뜬 흙을 올려 보인다. 미국에서 가장 기름진 땅이란다. “우리 새로 시작한다 그랬잖아. 이게 그거야.” 모니카는 눈을 질끈 감는다. “이게 당신이 말한 시작이면, 우린 가망 없어.” 미국에 가서 서로를 구해주겠노라 약속했던 젊은 한인 부부의 희망은 빛이 바래 보였다.

영화 ‘미나리’는 한국계 미국인 정이삭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로, 1980년대 아메리칸 드림을 열망하며 미국 남부 아칸소로 이민을 간 한인 가족의 정착기를 풀어낸다. 이민 부부의 자녀들을 돌보기 위해 미국행 비행기를 탄 순자(윤여정)와 심장이 약한 어린 손자 데이빗(앨런 김) 사이 낯섦에 주제 의식이 담겨 있다. 이민 1세대가 느꼈던 혼란과 그다음 세대 아이들이 겪은 정체성에 대한 문화적 혼란을 대변한다.

데이빗-순자의 관계성을 주제에 담은 1980년대 가족의 이야기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장면마다 생성되는 크고 작은 질문들이 나를 향했다. 신기하게도 그 시절 가장(家長)인 제이콥의 이기심에서 내가 보였는데, 나만 느낀 게 아니었다. “꼭 우리 같지 않아?” 하며 남자친구가 말을 걸었다. 제이콥과 모니카를 보며 건강한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된 건 정말 우리 이야기 같아서다. 제이콥의 고집을, 모니카의 헌신을 그리고 이들의 대립을 내 삶에 대입하게 되는 사고의 흐름은 꽤 자연스러웠다.

제이콥은 아빠도 뭔가를 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오랫동안 품어온 꿈은 문제적 관계의 원인이 아니다. 모니카와의 소통은 논의가 아닌 통보로 지속한다. 모니카도 미국에서 하고 싶은 게 많았다. 하지만 아픈 아들을, 평안한 가정을 지키기 위해 내려놓기를 택했다. 그러면서도 제이콥의 무모함을 적극적으로 꺾지는 않았다.

관계는 맺음보다 단절이 더 어렵다는 걸 모니카의 순간들이 담아낸다. 모니카는 결국 바퀴 달린 집에 살기로 했고, 농장 일로 지친 남편의 머리를 감겨줬으며, 우물이 말라 생활용 수도를 끌어다 쓰는 걸 알면서도 눈감아 줬다. 제이콥에게도 수많은 망설임이 있었다. 사실 가장 힘든 건 그였을지 모른다. 제이콥에게는 정 감독의 모습이 투영됐는데, 그는 “나는 꿈을 가지면서도 가족을 위해 삶을 꾸려나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어찌 됐든 가족은 결국 바퀴 달린 집에 남기로 한다. 이런 선택은 물과 불로 표현된다. 통상 물은 생명을, 불은 죽음을 뜻하지만 여기선 다르다. 물은 내일을 꿈꾸게 했는데 결국 절망을 안겼고, 불은 모든 걸 재로 만들면서도 출발점으로 돌아가게 했다. 이 과정은 퍽 희망적으로 묘사된다. 정 감독은 이 영화를 ‘자식의 미래를 위해 희망을 걸었던 세상 모든 부모를 향한 러브레터’라고 불렀다.

남자친구는 미나리의 115분에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절망감과 패배감이 담겨 있다고 평가했다. 나는 이 의견에 더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여러 종류의 연민과 사랑 역시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껏 함께 본 영화가 수두룩한데, (긍정적이든 아니든) 남자친구가 우리의 관계와 자신의 경험에 비춰 공감 능력을 발휘한 건 처음이었다. 미국 독립영화가 전해준 뜻밖에도 진한 한국적 정서가 여운처럼 따라붙었다.

‘할머니가 생각나는 영화였어요.’ 미나리의 감상평 대부분은 이랬다. 보통은 ‘연기가 좋았어요’ ‘연출이 남달랐어요’ ‘스토리가 흥미로웠어요’ 같은 평이지만, 미나리는 달랐다. 영화는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관객으로 하여금 경험을 반추하도록 했다. 주인공은 할머니가 될 수도, 아버지가 될 수도, 친구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제이콥과 모니카의 성장에서 관계 정립에 대해 오래 고민했다.

미나리는 지금도 어딘가에서 조금씩 다른 물음을 던지고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1세대 이민 가족의 장녀에 대해, 누군가는 모니카의 외로움에 대해, 또 다른 이는 제이콥의 책임감에 대해 생각할 수도 있다. 미나리는 어느 이민 가족의 이야기지만, 동시에 아주 보편적인 가치를 이야기하고 있다. 평범한 인간 군상에 담아낸 진짜 우리의 이야기. 잔잔하지만, 지루하지 않은 미나리의 힘은 여기서 나오는 게 아닐까.

박민지 문화스포츠레저부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