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미술품 컬렉션 유산이 촉발한 상속세의 물납제 확대 개정 법안이 국회 상정조차 되지 않은 것으로 17일 확인됐다. 물납제 확대가 삼성 컬렉션 때문만은 아니지만, 미술계 일각에서는 이건희 컬렉션이 흩어지지 않도록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물납제 개정안 국회 상정조차 안 됐다
문화체육관광부를 비롯한 문화계는 법 개정을 위해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지난 11일 화랑협회와 고미술협회가 공동 세미나를 여는 등 여론몰이를 지속 하고 있다. 문체부는 앞서 지난해 12월 1일 박물관협회와 함께 ‘상속세의 문화재·미술품 물납제도 도입을 위한 전문가 토론회’를 개최하는 등 법안 상정에 총대를 멨다. 이달 들어서는 전직 문체부 장관들까지 성명을 발표하며 거들었다.
정작 입법 현장에서는 속도 조절 분위기가 감지된다. 물납제 논의는 이광재 더불어민주당 의원(기획재정위 소속)이 지난해 11월 상속세 및 증여세법 개정안을 발의하면서 점화됐다. 그러나 취지와 다르게 ‘삼성을 위한 법 아니냐’는 특혜 시비가 불거져 여당도 당혹스러워하는 눈치다. 기재위 간사인 윤후덕 위원장(더불어민주당)도 최근 “현재로선 안건 상정이 어렵다”고 의사를 밝힌 것으로 17일 전해졌다. 이광재 의원실 관계자는 “예술계 숙원 해소도 중요하지만, 이 제도가 도입되는 단계에서 논란 소지 없이 충분한 국민적 공감대 속에서 논의가 진전돼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이어 “또 미술품의 가치를 평가하는 감정평가 업무 또한 제도적으로 정비되지 못해 이 부분이 보완되는 것과 보조를 같이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미술품 감정을 담당하는 소관 부처를 기재부로 할지, 문체부로 할지, 아니면 민간에 맡길지 등의 문제가 선결돼야 한다는 것이다.
기재부 관계자도 “(중립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며 원론적 답변을 했다. 무엇보다 현안에서 우선순위에 밀리는 데다 세수 감소 등 따져야 할 요인이 많기 때문으로 보인다. 따라서 물납제 관련 개정안의 국회 상정은 4월 보궐선거 이후는 물론 9월 정기국회까지로 늦춰질 개연성이 높다.
문체부 관계자는 “관련 부처와 협의해 9월 정기국회에는 꼭 상정되도록 한다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그때 상정되더라도 국회 논의 절차를 고려하면 이 개정안의 연내 국회 통과는 불투명해 보인다.
삼성가 미술품 납세 물 건너가나?
고 이 회장의 장남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4월 30일까지 상속세를 신고 납부해야 한다. 현행 상속세 및 증여세법은 상속세를 현금으로 내도록 하고 있다. 다만 부동산과 비상장 주식에 한해 예외적으로 물납을 허용한다. 물납 범위를 미술품으로 확대하는 개정안은 국회 상정조차 안 된 만큼 이 부회장이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미술품 상속세도 현금으로 내야 한다.
하지만 연부연납 제도 때문에 물납 기회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첫 신고 납부 시 연부연납을 신청하면 이후 5년 동안 전체 6번에 걸쳐 상속세를 나눠 낼 수 있는데, 첫 신고 때 2번째 납부분에 한해 물납을 신청하면 되기 때문이다. 만약 연내 개정안이 통과되면 이 제도의 혜택을 내년에 일부 받을 수 있다.
“대타협 통한 우회로 고민해야!”
그런데도 여론의 눈총을 고려하면 삼성으로서는 새로운 물납 제도를 이용하기가 쉽지는 않다. 따라서 ‘이건희 컬렉션’이 뿔뿔이 흩어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는 발상의 전환과 우회로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건희 컬렉션은 알베르토 자코메티, 프랜시스 베이컨 등 서양 근현대미술품과 청화백자를 포함한 한국 고미술품 등 1만2000여 점으로 가격이 최대 3조 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 11일 화랑협회와 고미술협회 주최 공동 세미나에서 발제자로 나선 최병서 동덕여대 명예교수는 “물납 제도를 급히 도입하면 (삼성 특혜 등) 오해의 소지가 있다”면서 “그런데도 삼성가 소장 컬렉션이 세계에 내놔도 손색이 없을 만큼 예술적 가치가 있다면 그 보존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삼성·국세청·문체부·서울시가 대타협을 통해 우회적인 방법으로 물납제와 같은 효과를 내는 방법을 찾을 것을 주문했다. 국가가 이건희 컬렉션을 예산으로 저렴하게 사고, 서울시 등에서 부지를 내놓아 ‘이건희 미술관’을 국립 혹은 시립으로 짓는 방법을 고민해볼 수 있다고 제안했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