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신도시는 죄가 없다

입력 2021-03-18 04:08

어릴 때 즐겨 했던 ‘부루마블’이라는 보드게임이 있다. 주사위를 던져 먼저 도착한 사람이 해당 도시(토지)를 사고, 건물도 지을 수 있다. 나중에 온 사람은 지주에게 임대료를 내야 한다. 게임 승리 전략은 간단하다. 미리 받은 종잣돈으로 비싼 임대료를 챙길 수 있는 토지를 먼저 사두면 된다. 시작은 같지만 대개 한 명이 독식하고, 나머지는 파산하는 식으로 게임은 끝난다. 부루마블 보드게임의 원조는 ‘랜드로드(지주)게임’이다. 1902년 지질학자 엘리자베스 매기는 땅을 선점한 자가 부를 다 빨아들일 수 있다는 위험성과 부동산 불로소득이 가져올 불공정성을 알리기 위해 이 게임을 만들었다. 매기는 19세기 미국의 경제학자 헨리 조지의 신봉자였다.

조지는 생산이 늘어나면 땅 투기로 인해 지대가 임금보다 더 빨리 상승하고, 격차가 갈수록 커져 빈곤을 심화시킨다고 봤다. 이를 타파하려면 지대를 통해 얻은 불로소득 전액을 세금으로 거둬 빈곤층을 위해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조지를 사회주의자라고 몰아붙인다. 하지만 조지가 토지단일세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 건 불로소득 차단이 시장경제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한 전제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는 게 그를 연구한 학자들의 대체적인 의견이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는 점에서 조지의 토지공개념 주장의 근거를 “토지는 다 내(하나님) 것임이니라”고 천명한 구약성서 레위기 25장 23절에서 찾는 시각도 있다.

매기같이 조지를 추종하는 ‘조지스트’들이 국내에도 적지 않다. 이들이 노무현·문재인정부 핵심 정책라인에 기용돼 토지공개념에 입각한 종합부동산세 신설, 분양가 상한제, 재건축 초과이익 환수제 시행을 주도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공교롭게 두 정부에서 모두 부동산 가격이 급등했고 무주택자와 서민들이 고통을 겪었다. 국정 지지율도 크게 하락했다. 물론 이런 상황을 ‘조지스트의 실패’로 귀결하는 것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정책효과는 서서히 나타나는 데다 정책 시행 당시 국내외 경제상황이 갖는 특수성도 고려해야 한다는 이유다.

사실 박정희정부도 거론했던 토지공개념, 즉 조지의 이론을 처음으로 제도화한 건 노태우정부였다. 요즘처럼 유동성이 늘고 투기가 급증해 집값이 폭등하자 1989년 당시 정부는 ‘토지공개념 3법’이라고 불리는 토지초과이득세·개발이익환수제·택지소유상한제를 도입했다. 그러나 집값은 바로 잡히지 않았다. ‘1기 신도시’라는 대규모 공급안이 나오고 나서야 집값은 급격히 안정됐다. 변창흠 국토교통부 장관도 조지스트로 분류된다. 그는 조지의 저서 ‘진보와 빈곤’을 읽고 사회의 불평등을 결정짓는 부동산 문제를 연구하기로 결심했다고 밝혀왔다. 그런 그가 취임 후 들고 나온 정책은 대규모 공공주도 공급 방안이다. 노태우정부 후반기가 오버랩되는 장면이다.

하지만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의 신도시 땅 투기 의혹 여파로 변 장관은 공급대책을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하고 낙마하게 됐다. 수장이 조지스트였던 것을 비웃듯 LH 직원들이 변 장관의 사장 재임 당시 불로소득을 탐닉했던 정황이 드러나고 있고, 이제 특검 수사를 앞두고 있다.

공직자들의 투기 의혹은 철저히 조사돼야 한다. 하지만 ‘투기 때리기’로만 이 사태를 마무리해선 안 된다. 왜 청년들까지 근로소득은 뒤로하고 부동산, 주식, 비트코인 등 자본소득에만 혈안이 되고 있는지에 대해 사회 전체가 고민해 봐야 한다. 아울러 3기 신도시 취소 여론이 비등하지만 변 장관이 LH 직원들의 돈을 불리기 위해 대책을 만든 게 아니라면 공급 대책은 보완해 추진해야 한다. 1인 가구 증가 등 구조적으로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한장희 산업부장 jh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