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못 피우고 짓밟힌 ‘미얀마의 봄’

입력 2021-03-20 04:01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지난 2월 1일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미얀마 군부가 이에 반대하는 시민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하면서 연일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다. 사망자만 수천명으로 추정되는 1988년 '8888 항쟁' 당시의 대규모 유혈사태가 33년 만에 재연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온다. 미국 등 국제사회가 연일 군부 쿠데타 세력을 향해 경고 메시지를 발신하고 있지만 군경의 총질을 멈추지 못하고 있다. 미얀마 시민들은 '보호책임(R2P)' 개념을 근거로 유엔에 군사적 개입을 촉구하고 있다. 그러나 실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특히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이사국인 중국과 러시아는 '내정 불간섭'을 이유로 국제사회의 미얀마 사태 개입에 반대하고 있다.

동남아 관측통들은 미얀마에서 군부 쿠데타가 예견됐던 일이라고 보고 있다.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이 이끄는 민주진영과 군부의 '어색한 동거'가 계속되긴 어려웠다는 것이다. 1948년 독립 이후 미얀마를 장기 지배해온 군부는 문민정부 출범 이후에도 의회 의석의 4분의 1을 차지하고 내각 핵심 인사를 지명하고 있다. 또 통신과 금융, 식음료 등 각종 이권도 장악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반쪽짜리 민주화

지난 2일(현지시간) 방패로 무장한 미얀마 진압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전진하고 있다. 군부 쿠데타에 맞선 미얀마의 민주화 시위는 한 달 넘게 이어지며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미얀마는 매우 독특한 권력 구조를 취하고 있다. 한국을 포함해 세계 각국은 군 통수권을 대통령 등 국가원수가 보유하도록 한 반면, 미얀마는 군 통수권을 대통령이 아닌 군 최고사령관이 갖는다. 군 최고사령관이 이번 쿠데타를 주도한 민 아웅 흘라잉이다.

뿐만 아니라 미얀마 군부는 군대 내 행정과 사법을 외부 간섭 없이 독자적으로 행사할 권한도 보유하고 있다. 사실상 국가 안에 또 다른 군부 국가가 존재해온 셈이다.

미얀마 정치 체제가 기형적인 건 현행 헌법 자체가 군부에 의해 마련됐기 때문이다. 2008년 군부 주도로 제정된 신헌법은 표면적으로는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군부의 권력 상실을 막기 위한 안전판에 불과하다. 특히 헌법 개정 요건을 의회 재적 4분의 3 이상으로 규정하고 있어 선거 결과와 무관하게 의석 4분의 1을 무조건 확보하는 군부의 동의 없이는 권력 구조에 손도 댈 수 없게 했다.

이런 구조에서 미얀마에 한때나마 민주화 바람이 불었던 건 테인 세인 전 대통령이 주도했던 개혁·개방 정책 덕분이었다. 테인 세인 전 대통령은 본인이 군부 출신임에도 정치범 석방과 언론 검열 중단, 야당 탄압 완화 등 전향적인 조치를 잇달아 내놓으며 주목을 받았다. 미국과 유럽연합(EU)은 테인 세인 정부의 개혁 조치를 높이 평가하며 경제 제재 해제 등으로 화답했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2012년 11월 현직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미얀마를 방문함으로써 미얀마의 국제사회 복귀를 사실상 공식화하기도 했다.

오랜 시간 군부와 싸워온 수치 고문도 테인 세인 정부를 지지했다. 수치 고문이 미얀마에서 정치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던 것도 테인 세인 정부의 개혁 덕분이었다. 수치 고문이 이끄는 민족민주동맹(NLD)은 2012년 4월 보궐선거에서 43석을 획득하며 급부상했다. 3년 뒤인 2015년 NLD가 총선에서 군부 정당을 누르고 압승을 거두면서 명실상부한 문민정부가 출범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미얀마 문민정부는 2기 시작을 앞두고 다시 군부에 짓밟혔다.

군부는 왜 문민정부를 배신했나

지난 2일(현지시간) 미얀마 최대 도시 양곤에서 시위대가 최루가스 속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다. AP연합뉴스

수치 고문은 민주화 운동에 평생을 바친 끝에 집권에 성공하기는 했지만 권력을 온전히 획득한 건 아니었다. 수치 고문은 외국인 배우자나 자녀를 둔 인사는 대통령이나 부통령에 취임할 수 없다는 헌법 조항 탓에 법적 근거가 없는 국가고문 직함으로 국정을 운영해왔다.

무엇보다 군부에 과도한 특권을 부여한 현행 헌법 탓에 군부가 변심하면 언제든 정권을 잃을 위험이 상존했다. 문민정부와 군부의 기형적인 권력 분점 때문에 민주주의와 권위주의가 뒤섞인 ‘하이브리드 체제’라는 평가도 존재한다.

수치 고문은 군부의 힘을 빼기 위해 여러 차례 헌법 개정을 시도했지만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수치 고문의 거듭된 개헌 요구가 도리어 군부를 자극했을 것이라는 관측도 제기됐다.

개헌을 위해 군부와 협상하겠다던 수치 고문은 2018년 이후 의회 장악을 통한 직접 개헌으로 전략을 수정했다. 실제로 수치 고문이 이끄는 NLD가 지난해 11월 총선에서 또다시 압승을 거두면서 군부의 권력 상실에 대한 불안감이 더욱 커진 것으로 보인다.

수치 고문의 정치적 역량도 군부와 위태로운 줄다리기를 벌이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외신에 따르면 문민정부 측은 민간 정치인과 군부 간 소통 창구인 국방안보평의회(NDSC)를 2016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 한 차례도 소집하지 않았다고 한다. NDSC 구성원 11명 중 과반인 6명이 군부 측 인사여서 자신들에게 불리하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군부 측은 문민정부의 NDSC 소집 거부를 자신들에 대한 무시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수치 고문은 군부 지도자인 흘라잉 최고사령관과도 최근 1~2년 사이 전혀 소통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수치 고문과 NLD가 지난해 말부터 이어진 군부의 부정선거 주장에 대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군부 고위 인사들이 잇달아 쿠데타 위협 발언을 쏟아내고 이에 유엔과 미얀마 주재 외교사절단이 잇달아 군부 비판 성명을 내는 와중에도 수치 고문 측은 사실상 손을 놓고 있었다. 쿠데타 이후 군부에 의해 구금된 수치 고문은 뇌물수수 등 각종 혐의로 최장 24년형을 선고받을 처지에 놓였다.

흘라잉 최고사령관의 정치적 야망은 쿠데타의 또 다른 요인으로 꼽힌다. 올해 65세인 흘라잉 사령관은 60세가 되던 2016년에 은퇴해야 했지만 규정을 바꿔 정년을 5년 연장했다. 다시 정년이 임박한 그가 수치 고문이 이끄는 NLD의 총선 대승으로 높아진 군부의 불안감을 이용해 쿠데타를 감행했다는 분석이다.

조성은 기자 jse13080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