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8월, 경기도 수원 천천중 2학년생 김수현은 식사하며 시청하던 TV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베이징올림픽에서 인상(140㎏)·용상(186㎏) 합계 326㎏를 들어 올려 세계기록을 경신하고 금메달을 목에 건 한국의 역사(力士)에게 매료된 것이다. 바로 장미란이었다.
자신의 체중보다 몇 배나 무거운 쇳덩어리와 힘을 경쟁하는 역도는 건장한 성인에게도 선뜻 도전하기 어려운 종목이다. 하지만 중학생 김수현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그 무게를 이기고 포효하는 장미란의 새빨개진 얼굴과 핏대를 세운 두 팔, 갑옷처럼 단단한 근육, 그리고 경기장을 휘감은 함성소리였다. 살면서 느껴보지 못한 전율이 김수현의 온몸을 휘감았다.
“엄마, 나도 저 운동 해볼까?” 겁도 없는 딸에게 엄마는 “너라면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며 도전을 격려했다. 제 발로 찾아오는 선수가 거의 없는 역도를 먼저 해보겠다며 다가온 학생에게 교사들도 적극적으로 길을 열어 줬다. 인근 경기체고에 소개해 김수현이 역도에 입문할 수 있도록 했다.
또래보다 조금 늦게 시작한 역도. 역시나 만만한 운동은 아니었다. 하지만 김수현은 스스로 마음먹은 일을 먼저 포기하는 법이 없는 악바리였다. 역도 선수로 성장하는 데 그렇게 거창한 이유가 필요하지도 않았다. 김수현은 엄마와 친구들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지도 교사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 동료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바벨을 들었다.
조금씩 바벨의 무게를 늘려가다 보니 어느새 전국체전을 넘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입상권 주자로 자라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장미란을 보고 역기를 잡았던 중학생 김수현. 이제 국가대표로 성장해 생애 첫 올림픽에 도전하고 있다.
도쿄올림픽 출전을 목표로 충북 진천 국가대표 선수촌에서 구슬땀을 쏟고 있는 김수현은 11일 전화 인터뷰에서 “남들보다 늦게 운동을 시작했다. 도쿄올림픽을 선수 인생의 새로운 출발점이라는 각오로 준비하고 있다”며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내겠다”고 말했다.
한국 역도는 13년 전 베이징올림픽에서 여자 75㎏급의 장미란, 남자 77㎏급의 사재혁을 마지막으로 금메달을 되찾지 못했다. 만 26세인 김수현은 올림픽 금맥을 다시 뚫어야 하는 과제를 안은 ‘포스트 장미란’ 세대다.
김수현은 “한국 역도의 기량이 과거와 비교했을 때 많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다. 역도 국가대표들은 (장)미란이 언니의 선전으로 기회를 얻은 세대다. 그 기회를 후배들에게 물려줘야 한다”며 “미란이 언니의 은퇴 이후 줄어든 지원을 끌어내 종목을 활성화기 위해서라도 도쿄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싶다”고 다짐했다.
김수현은 인터뷰 내내 “역도를 사랑한다”는 말을 반복했다. 하지만 올림픽 시상대를 바라보는 이유는 그저 오랫동안 쌓아온 역도 사랑 때문만은 아니다. 소속팀 인천시청 역도단을 지휘했던 고(故) 김경식 전 감독의 생전에 국제 종합대회 메달을 보여주지 못한 것이 지금도 김수현의 마음에 응어리로 남아 있어서다.
김수현은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메달권 바로 밑인 4위에 머물렀다. 그리고 이듬해 김 감독님이 세상을 떠나셨다. 내 메달을 감독님에게 보여드리지 못한 게 화가 나면서 슬프다”며 “그 이후로 내 마음가짐도 달라졌다. 개인적으로는 아쉬움도 씻어내고 싶고, 국민들에게 역도의 재미도 알려주고 싶다”고 강조했다.
도쿄올림픽 출전을 준비하는 국가대표들은 사상 처음으로 5년을 훈련한 세대가 됐다. 하지만 김수현은 이런 시련마저 기회로 삼고 있다. 그는 “코로나19 대유행 속에서 보낸 1년은 당연히 힘들었다. 하지만 내 선수 이력에서는 반환점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당초 올림픽 출전에 의의를 뒀지만, 1년을 더 훈련하면서 메달권 진입으로 목표를 바꿨다. 진천선수촌 퇴촌 기간에 인천에서 훈련하며 기술적으로 상당히 보강했다”고 말했다.
도쿄올림픽 역도 본선행 티켓을 경쟁하는 아시아선수권대회는 다음달 16~25일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서 열린다. 김수현은 이변이 없는 한 이 대회에서 올림픽 출전권을 손에 넣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미 훈련 일정을 4개월 앞으로 다가온 도쿄올림픽 개막일에 맞추고 있다. 지금은 훈련량을 점진적으로 늘려가며 몸을 예열하는 단계에 들어갔다. 때때로 긴장감이 찾아오지만, 김수현은 미국에서 유학 중인 장미란과 전화통화에서 힘을 얻는다고 한다.
김수현은 “미란이 언니와 종종 전화 통화로 안부를 주고받고 있다. 따뜻한 말로 긴장감을 풀어 주신다. 가끔은 ‘수현아, 넌 열심히 하고 있어, 잘하고 있어’라고 말씀해 주시는데, 그 말만 들어도 힘이 난다. 국가대표 후배로서 그보다 좋은 말이 어디에 있겠는가. 나도 미란이 언니 같은 선배가 되고 싶다”고 했다.
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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