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광동 (2) 청주상고→연대→외무고시 합격… 주님의 ‘빅 피처’

입력 2021-03-18 03:06
김광동 대표가 1972년 대학 복학 후 서울 북한산을 등반하고 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세계지도를 들여다보길 좋아했다. 역사와 지리에 관심이 많았다. 독서를 좋아해 학창시절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 ‘데미안’, 스탕달의 ‘적과 흑’,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등을 섭렵했다. 완전히 이해하지도 못했는데 왜 그렇게 소설책에 매달렸는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충북 청주 교동초등학교 6학년 때 집안이 기울어 학교에서 12㎞ 떨어진 청원군 복대리로 이사했다. 어린 나이에 왕복 4시간 거리를 통학하느라 고생했다. 청주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4남 2녀 중 장남으로서 어려운 집안 형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루빨리 직업 전선에 나서 동생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청주상고로 진학했다. 당시 상고 졸업생들에겐 은행이 최고의 직장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은행 일이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아 마음에 갈등이 컸다.

결국 3학년 2학기가 돼서야 대학에 진학하기로 마음먹었다. 학교의 허락을 받아 9월부터는 아예 시골 외갓집에 내려가 호롱불을 켜고 공부에 전념했다. 다른 과목은 독학해도 상관없는데, 수학이 문제였다. 상고에서는 대입에 필요한 일반 수학 대신에 상업 수학만 가르쳤으므로 사실상 수학을 배워 본 적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수학 문제집과 풀이집을 통째로 외워 버렸다.

1967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에 합격했다. 대학 입학과 함께 서울로 올라와 입주 가정교사와 과외 아르바이트를 번갈아 하면서 내내 떠돌며 살았으니 외교관의 운명이 일찍 시작됐던 듯하다. 그래도 나의 영원한 고향인 청주는 늘 그립다. 지금도 좋은 친구들이 항상 나를 반겨줘 고맙다.

69년 군에 입대해 72년 제대할 때까지 꼬박 만 3년을 복무하고 사병으로 전역했다. 68년 1·21 김신조 사건 여파로 군대 복무 기간이 2년 6개월에서 3년으로 연장된 혜택(?)을 봤다. 72년 1학기에 복학 후 6월 부친이 지병인 간암으로 돌아가셨다. 헛헛한 마음에 친구들과 무전여행을 떠났지만, 흥이 나지 않았다. 그해 10월엔 비상계엄이 선포돼 대학에 휴교조처가 내려졌다. 학교 문이 닫혀 갈 곳이 없던 차에 11월 고향에 내려가 이듬해 3월에 있을 외무고시 1차 시험 준비를 했다. 4개월가량 하루 17시간을 꼼짝 않고 앉아서 공부에 집중했다. 다행히 1차에 합격하고 다시 한 달 동안 밤을 새워 가며 2차 시험 준비에 매달렸다. 5개월간 모든 에너지를 쏟아 집중한 덕에 제7회 외무고시에 최종 합격했다. 주위에서 기적 같은 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사실 암기력은 어린 시절 나의 유일한 재능이었다. 외우는 것만큼은 누구보다도 자신 있었다. 그 덕분에 배운 적도 없는 수학 과목인데 책을 달달 외워 대입에 성공했다. 외무고시 합격도 하나님 큰 퍼즐의 일부였다.

정리=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