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그맨 지망생들은 오디션에서 성대모사를 즐겨한다. 그냥 복사기 수준이어선 곤란하다. ‘이런 상황에서 그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라는 걸 가정하고 연기해야 박수를 받는다. 시의성이 가미되면 추가점수를 받기도 한다. 성대모사는 유명인을 대상으로 하는 게 보통이지만 일반인도 더러는 모사의 대상이 된다. 김수미는 자신이 어릴 적 유심히 봤던 동네 할머니가 ‘전원일기’의 일용엄니(복길할머니) 모델이라고 고백한 바 있다. 매력 있는 오리지널, 관찰과 탐구, 기억력과 상상력, 표현력이 장수캐릭터를 만든 요인이었다.
“얼굴도 못생긴 것들이 잘난 척하기는. 적어도 내 얼굴 정도는 돼야지.” 개그맨 정종철은 옥동자의 말뜻을 반대편 진영에까지 확장한 공로가 있다. 인간 비트박스로도 통한다. ‘갈갈이 3형제’에선 교장 선생님 흉내를 내서 모교의 지명도를 높였다. 그가 다닌 온곡초등학교는 당시(재학 시가 아니고 방송 시)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초등학교가 됐다. 심지어 ‘TV는 사랑을 싣고’에 나와서 온곡초등학교 시절에 짝사랑하던 친구를 찾기도 했다. 사실 그 학교 교장 선생님이 유별나게 웃음을 유발하는 캐릭터는 아니었다. 그분의 확성기 훈화는 “사랑하는…하는…온곡…곡… 초등학교…등학교”로 시작되는데 목소리나 내용보다는 열악한 교내시설의 추억이 시청자의 공감을 자아냈다. 게다가 우리가 예전에 들었던 훈화는 또 얼마나 지루했던가. 뙤약볕 아래서 듣다가 쓰러져 양호실로 실려 가는 아이가 한 둘씩 나왔던 기억이 난다. 교장 선생님은 왜 그토록 길게 말씀하셨을까. 의도 자체는 좋았다. 아마도 학생들이 잘 자라길 바랐기 때문이리라. 실제로 시간을 재보면 그렇게 길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시청자(학생들)가 지루했다면 그건 개선할 여지가 충분하다. “다 너희 잘되라고 하는 말씀이야.” 담임의 위로가 설득력을 지니려면 그 담임이 교장이 되었을 때 말은 짧게 하고 시설은 보강하면 된다.
시간이 흘러도 말의 총량은 줄지 않았다. 다만 언어의 축약은 상당히 이뤄졌다. 말을 짧게 하다 보니 못 알아듣는 말이 많아진 건 유감이다. 내가 어릴 때 ‘쓰봉’은 바지를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쓰봉’은 쓰레기봉투가 됐다. 그러니까 ‘음쓰봉’은 음식물쓰레기 봉투다. 여덟 글자가 세 글자로 주니 이걸 경제적이라고 해야 하나. 뉴스를 보다가도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들과 종종 부딪친다. 최근에 이런 뉴스가 있었다. “게임에서 알게 된 사람이 ‘현피’를 요구해서 만났는데 말다툼이 벌어졌고 급기야 흉기를 휘둘러 한 사람이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아마 내 동기들 대부분은 ‘현피’를 모를 거라 예상한다. (의문의 1패를 당한 친구들께 송구) 나 역시도 현실도피의 준말 아닐까 추측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현피’는 현실의 ‘현’과 PK(Player Kill)의 ‘P’가 만난 ‘이중국적’어였다. 온라인상에서 시비가 붙은 사람들이 실제로 만나 충돌을 벌이는 일이 ‘현피’였던 거다.
현실과 플레이어.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플레이인가. 플레이는 어느 선까지 허용되는가. 사건의 주인공들도 처음엔 재미로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열을 받고 온라인을 박차며 집을 뛰쳐나가더니 결국은 사고를 낸 것이다. 사실은 관찰 예능을 말하려다가 여기까지 왔다. 한참을 웃기다 분위기가 다른 방향으로 갈 때쯤 ‘개그는 개그일 뿐 따라 하지 말자’로 서둘러 끝낸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우리 애가 그거 보고 나쁜 영향 받으면 어떡할 거야.” 이런 항의가 염려돼서 미리 방어막을 쳤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내가 처음 낸 추돌사고의 기억이 생생하다. ‘전방주시 태만’ ‘안전거리 미확보’ 종로경찰서의 담당관은 사건 경위를 이렇게 적시했다. 방송에서도 마찬가지다. 일어날 전방의 미래를 내다보아야 한다. 그리고 시청자와의 안전거리를 확보해야 한다.
2019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페터 한트케의 대표작은 ‘관객모독’이다. 사전정보 없이 친구 따라 극장에 들어선 사람은 중간에 물을 것이다. “저거 어디까지가 진짜야?” ‘관객모독’을 보러 간 관객이 모욕당했다고 작가나 연출자를 고발한 기록은 못 봤다. 관객은 모독당할 각오를 하고 극장에 간 것이다. 제목에서 이미 관객의 허용(관용)을 구하고 플레이를 펼쳤기 때문에 안전망이 형성됐다.
‘나 혼자 산다’ ‘살림하는 남자’ ‘미운우리새끼’ 이런 프로는 어디까지 리얼(사실)일까. 대본이란 게 있을까. 당연히 있다. 그러나 대본대로 플레이할 필요는 없다. 상황 속에서 더 재미있는 말이 튀어나오면 대본에 없어도 제작진은 무한 허용한다. 정확히 하는 게 아니라 재밌게 하는 게 목표다. 질문을 받으면 난 이렇게 답한다. “드라마는 대본대로 하니까 반드시 대본이 먼저 있어야겠죠. 자연다큐, 휴먼다큐는 먼저 촬영하고 나중에 편집하면서 대본(내레이션)을 쓰는 게 보통이죠. 예능 대본은 현장에서 협업으로 만들어진다고 보는 게 좋아요. 제작진은 적역을 고른 후 말하죠. 재밌게 만들어보려고 이런 걸 구상했는데 당신이 거기 딱 어울려요. 카메라 의식하지 말고 마음껏 놀아보세요.”
예능인의 반대편에 자연인이 있다. ‘나는 자연인이다’에 나오는 상황은 진짜 백퍼센트 리얼일까. 자연은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지만 자연인은 카메라를 의식한다. 리얼이 바탕이지만 편집이라는 과정이 있음을 그는 안다. 소나무와 삽살개는 편집에 관여하지 않는다. 자연인에겐 자신의 모습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의도와 보상이 존재한다. 요청도 할 것이다. “이건 빼주세요.”
PD의 기준은 담백하다. 시청자가 시간 가는 줄 몰라야 한다. 영리한 자연인이 이런 제작진의 취지를 간파하고 적극적으로 재미 위주의 플레이를 펼치면 어떨까. 그때 그는 자연인이 아니라 예능인에 가까워진다. 사실 TV는 보던 사람이 늘 본다. 시청자는 플레이어보다 더 많이 관찰한 유경험자다. 그들은 인정사정 보지 않는다. 지루하면 바로 채널을 돌린다. 피곤하면 TV를 꺼버린다.
관찰 예능에 나오는 인물들은 자연인과 예능인 사이에서 살길을 찾은 사람들이다. ‘1호가 될 순 없어’에 보면 개그맨 최양락 부부는 쓸데없는(?) 걸로 너무 많이 다툰다. 아내인 팽현숙은 남편을 달달 볶는다. 그건 리얼일까. 연극은 아니지만 굳이 저럴 필요까진 없을 거 같은데. 그러나 프로플레이어들은 안다. 재미가 없으면 존재감도 없다. 내용이 무엇이건 간에 방향은 분명하다. 오직 시청자를 즐겁게 할 것. 관록 있는 플레이어들과 경험 풍부한 시청자들은 어느 지점에서 만나게 된다. 그리고 무릎을 친다. “가장 큰 즐거움은 깨달음이야.” “즐거움은 깨달음으로 가는 과정이야.”
사생활을 공개함으로써 갖는 ‘관종’의 고단함도 있지만 사생활이 남에게 비쳐짐으로써 숨겨진 자아를 되찾는 기쁨도 무시할 수 없다. ‘관중’으로서는 스타의 사생활을 훔쳐봄으로써 ‘쟤들도 별 수 없군’하며 씹는 쾌감도 맛보지만 결국 그것을 통해 자신의 삶도 한 번쯤 돌아보는 기회를 갖게 된다. 여기서 또 신조어가 등장한다. 그것은 ‘현피’가 아니라 ‘현타’다. ‘현타’는 ‘현실자각타임’을 줄인 말이다. 시사용어사전엔 ‘헛된 꿈이나 망상 따위에 빠져 있다가 자기가 처한 실제상황을 깨닫게 되는 시간’이라고 나와 있다. 예문도 친절하다. “혼자 편의점도시락 먹으려니 ‘나는 왜 이렇게 사나’ 현타가 온다.”
관찰은 성찰로 가는 입구다. 그사이에 통찰이 있다. 관찰은 겉을 보는 것이고 통찰은 속을 보는 것이지만 성찰은 나를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