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년차 배우 윤여정이 일을 냈다. 영화 ‘미나리’에서 할머니 순자 역을 맡은 윤여정이 아카데미상 시상식 여우조연상 후보로 지명됐다. 한국 배우가 아카데미 연기상 후보에 오른 것은 한국 영화계 역사상 처음이다. 지난해 아카데미에서 4개 부문을 석권한 영화 ‘기생충’도 이루지 못한 것이다.
아카데미상 시상식을 주관하는 미국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는 다음 달 25일 개최되는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 최종 후보를 15일 발표했다. 미나리는 여우조연상을 포함해 최고 영예인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남우주연상(스티븐연), 음악상 등 6개 부문 후보에 지명됐다.
미나리는 한국계 미국인 정이삭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를 풀어낸 미국 독립 영화다. 1980년대 아메리칸드림을 열망하며 미국 남부로 떠난 한인 가족의 정착기를 담담하게 그려냈다. 윤여정이 연기하는 순자는 어디서나 잘 자라는 미나리를 상징한다.
이번 연기상 노미네이트는 전 세계 영화계에 묵직한 메시지를 던진다. 그동안 아카데미 연기상 부문 후보에 유색인종 배우는 거의 없었다. 지난해엔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신시아 에리보가 유일했다. 뿌리 깊은 백인 우월주의로 악명높은 아카데미상의 높은 벽을 이번에 한국의 70대 여배우인 윤여정이 깼다. 윤여정이 여우조연상을 받는다면 ‘사요나라’(1957)의 일본 배우 우메키 미요시에 이어 아시아계 역대 두 번째 수상자다.
제이콥을 연기한 스티븐연 역시 아시아계 미국인 최초로 남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 되는 쾌거를 이뤘다. 스티븐연은 미국 드라마 ‘워킹 데드’ 시리즈로 스타덤에 올랐고, 봉준호 감독의 ‘옥자’, 이창동 감독의 ‘버닝’ 등 한국 작품에도 다수 출연했다.
정지욱 영화평론가는 “윤여정은 미나리에서 한국 할머니의 모습을 매우 강렬하고 인상적으로 남기면서 ‘윤여정다운 연기’를 선보였다”며 “아카데미가 다양성을 존중하고, 유색인종에 대한 배려에 집중하겠다고 선언한 점 역시 후보 지명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앞서 미나리는 크리틱스 초이스, 골든글로브 등 전 세계 주요 시상식에서 약 90개의 트로피를 쓸어 담았다. 다만 미국 제작사가 만들고 미국 땅에서 미국인 감독과 배우, 스태프들이 참여했지만 대사의 50% 이상이 영어가 아니라는 이유로 골든글로브에서 외국어영화상 후보로 올라 파문이 일기도 했다. 미나리는 이번 아카데미에서 중국 출신 여성 감독 클로이 자오의 ‘노매드랜드’와 경쟁할 것으로 보인다. 감독상과 작품상 등 6개 부문에 이름을 올린 ‘노매드랜드’는 지난해 베네치아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부터 독보적인 수상 기록을 써왔다.
한편 한국 단편 애니메이션 ‘오페라’도 아카데미 최종 후보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한국계 미국인 에릭 오가 감독한 이 작품은 한국 제작사가 설치 미디어 아트 전시를 위해 기획한 것이다. 원래 5분 길이였지만 아카데미 출품을 위해 9분 길이 상영본으로 재구성해 출품됐다. 에릭 오 감독은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서 ‘도리를 찾아서’ ‘인사이드 아웃’에 참여한 바 있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