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6일은 텔레그램 ‘박사방의 악마’ 조주빈(26)이 검거된 지 꼭 1년이 되는 날이다. ‘n번방’ 사건을 추적·보도해 온 국민일보 특별취재팀은 복수의 피해자와 활동가, 의료진 등의 증언을 토대로 조주빈 검거 후 1년 동안 피해자가 보낸 시간을 기록했다. 피해자 보호를 위해 피해 시기와 나이, 치료 시작일 등은 공개하지 않는다.
“벌 받아야 하는 건 그들인데, 지금까지 가혹한 처벌을 제가 스스로에게 내리고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더 이상 절 가두지 않아요. 연대해준 모든 분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의 피해자들은 자신을 가둬 놓은 사람이 조주빈(박사·구속)인지, 문형욱(갓갓·구속)인지 지금도 알지 못한다. 한 번도 정체를 드러낸 적 없었고, 궁금하지도 않았다. 세뇌의 공간과 지시의 통로는 온라인이었고, 피해자 대부분은 당시 중학생이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엔 너무 어렸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줄 알았는데, 시간은 그때에 멈춰버렸다. 하지만 지난해 3월 16일 조주빈이 검거되자 피해자들은 ‘아, 잡히는구나’하며 숨을 크게 내쉬었던 것을 기억했다.
그 소녀들의 1년
10여년간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를 상담해 온 박종석 연세봄정신건강의학과 원장은 14일 “텔레그램 성착취 피해자의 상태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단어는 ‘공황’”이라고 했다. 공황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모르다 공포가 확대되며 일상이 무너지는 현상이다. 공황은 사회와의 단절을 택하게 했다.
‘n번방’에 1년 넘게 갇혀 있던 A양은 가해자의 협박에 반항하려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가해자는 점진적으로 수위를 높였고, 정신적인 마비로 이어졌다. 박 원장은 “거부 의사를 공포와 협박으로 마비시켰기 때문에 피해자들은 판단력이 떨어지고 감정이 억압돼 있었다”고 진단했다.
6개월간 조주빈의 덫에 걸려 있었던 B양은 악몽에서 벗어나고도 한동안 공황 상태를 벗어날 수 없었다. SNS를 끊고 외출도 마다했고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지 못했다. TV에 나오는 남성 연예인을 쳐다보는 것조차 힘들었다.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는 것도 어려워 모든 대화를 휴대전화 메시지에 의지했다.
A양 역시 가해자가 줄줄이 검거되고도 한동안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사람과 스치기만 해도 깜짝깜짝 놀랐다. 처음엔 자신을 위협할 것 같은 젊은 남성층에 한정됐지만, 기피증은 점차 악화돼 할아버지나 어린아이를 보고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일이 반복됐다. 결국 A양도 오랜 시간 방문을 잠그고 지냈다.
공황 상태가 회복되기 시작한 건 수갑을 찬 가해자들을 미디어에서 본 무렵부터다. A양은 조주빈을 시작으로 공범들이 줄줄이 고개를 숙이고 경찰서로 향하자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초라한 행색의 가해자를 보며 ‘저 사람도 나랑 똑같은 인간이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B양은 조주빈 검거 직후 '이제 더 이상 무섭지 않다'는 메시지를 취재팀에게 보내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더 이상 당하지 않게 됐다'는 안도감보다 피해자들이 절대적 지배자로 여겼던 가해자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됐다는 점에 더 집중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박 원장은 "세뇌가 장기화되면 가해자를 우상화하고, 복종하는 심리를 갖게 된다"며 "민낯을 확인하면 현실을 직시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공황에서 벗어난다"고 설명했다. 이어 "가해자 검거와 단죄가 필요한 이유"라고 강조했다.
'n번방' 가해자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피해자를 협박하면서 "찍을래, 말래?"라는 식으로 피해자에게 선택권을 주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오랜 시간 세뇌당한 피해자들은 범죄에서 벗어난 후에도 '결국 내가 선택한 일인데…'라며 자책하는 모습을 보였다. 유튜브 '뇌부자들'을 운영하는 김지용 연세웰정신건강의학과 원장은 "잘못한 쪽이 누구인지를 객관적으로 알게 하는 과정이 중요하다"며 "가해자들이 처벌받는 모습은 피해자들이 정신적 건강함을 되찾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n번방 사건 이후 사회는
박 원장은 "자발적으로 병원을 찾는 성범죄 피해자가 이토록 많은 건 이례적이었다"며 "이전까지는 잠꼬대나 악몽 등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환자를 가족이 데리고 오는 경우가 많았지만 n번방 사건 이후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어 스스로 찾아오는 환자가 많아졌다"고 말했다.
n번방 사건 공론화 후 병원을 찾은 환자는 두 가지 경우로 분류된다. 숨어 있다 일상으로의 회복에 용기를 낸 피해자가 있는 반면, 이전 사건의 트라우마가 재발돼 치료를 받으러 온 경우도 있다. 일각에서는 n번방 사건 보도와 대대적 공론화가 오히려 이전 트라우마 피해자들에게 해롭지 않았냐는 우려를 내놓았지만, 박 원장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단기적으로 상처를 각성시킬 수는 있지만 이를 계기로 자신의 내면을 더 들여다보고 용기를 얻는 경우가 많다"며 "장기적으로는 더 단단한 정신을 지니게 되고 일상으로의 회복도 완벽해진다"고 분석했다.
취재팀이 확인한 많은 피해자가 조주빈 검거 후 1년 동안 서서히 일상으로 복귀하고 있었다. A양은 여전히 관계를 맺는데 두려움이 있지만 적어도 이젠 가족과의 가벼운 산책과 외식을 피하지 않는다. 병원에서 상담 치료도 받았고 가족의 보호 아래 다시 사회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나 B양처럼 여전히 치료를 거절하고 가족에게조차 피해 사실을 알리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B양은 당초 세상과 소통하고자 용기를 내 SNS 계정을 만들었는데 쏟아지는 2차 가해 탓에 계정을 닫아야 했다. 김 원장은 "트라우마는 혼자 이겨내기 어렵기 때문에 주변의 관심과 스스로의 의지가 절실하다"며 "사회는 피해자다움을 없애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
[조주빈 검거 1년... 얼마나 달라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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