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 미나리, 르완다

입력 2021-03-13 04:02

정이삭 감독의 영화 ‘미나리’를 봤다. ‘기생충’과 비슷한 스타일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달랐다. 저예산 독립영화에 가까웠고 따듯하고 담백하면서 섬세했다. ‘기생충’과 같은 블랙 유머와 서스펜스, 반전, 속도감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수 있다. 극장을 나서는 관객들의 표정이 묘했던 건 이런 이유이지 싶다.

미국에서 더 호평을 받은 이유도 짐작이 갔다. 한국인 내지 한국계 배우들과 한국어의 비중이 높지만, 무대는 미국 남부이고 이민 가정의 삶을 다룬다. 이민자의 나라인 미국에선 공감하기 쉬운 소재다.

극 중에서 묘사되는 아버지와 어머니는 한국적이다. 아버지는 완고해 보이지만 책임감이 강하고 가족을 위해서라면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어머니는 남편을 존중하고 지지하지만 자녀 교육·안전·건강 같은 현실적 고민이 앞선다. 미국 이민 가정을 다룬 영화인데도 북간도로, 하와이로, 중남미로, 중앙아시아로 떠나 맨주먹으로 삶의 터전을 일궈야 했던 근현대사 속 아버지와 가족의 모습이 겹쳐졌다.

‘미나리’를 관통하는 주제 중 하나는 갈등과 화해, 치유다. 흥미로운 건 악역이나 작위적 사건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 감독은 드라마틱한 캐릭터나 설정, 사건을 곁들임으로써 흥미를 유발하고 몰입감을 높이는 선택을 하지 않았다. 담백하게 일상의 크고 작은 사건들을 그려감으로써 공감의 여지를 넓혔다.

우리 일상에서도 선과 악이 분명하거나 원인과 책임이 분명한 일만 일어나는 건 아니다. 문제가 생겼지만, 누구의 잘못도 아니거나 각자 조금씩 다 책임이 있는 경우도 있다. ‘미나리’의 가족이 겪는 갈등도 비슷하다. 누구 때문인지 따지는 건 큰 의미가 없다.

정 감독의 인터뷰 기사들을 찾아본 후 그의 시선 뒤에 무엇이 있는지 조금 이해가 갔다. 그의 아내 발레리 추는 예술심리치료사로 트라우마 치유 전문가다. 2007년 국제예수전도단 소속으로 르완다에 봉사 활동을 가서 내전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이들을 돌봤다. 정 감독도 함께 가서 르완다 현지어로 영화 ‘무뉴랑가보’를 제작했다. 프랑스 칸영화제에서 ‘황금카메라상’과 ‘주목할 만한 시선’ 후보에 오른 이 작품의 주제도 화해와 치유였다.

2017년 6월 르완다로 출장을 간 적이 있다. 20여년 전 80만명이 학살당한 곳이라 믿기 힘들 정도로 거리가 평온했다. 희생자들이 집단 매장된 터 위에 세워진 수도 키갈리의 제노사이드기념관에 가서야 끔찍한 기억과 트라우마를 마주할 수 있었다. 잔인한 사실은 군인 경찰 같은 공권력이 아니라 평범한 이웃의 손에 죽임당한 희생자가 많았다는 점이었다. 가해자와 희생자는 같은 마을 이웃이거나 옆 마을 사람들이었고 학교 친구나 직장 동료였다. 생존자들은 물론이고 살육 현장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이들도 가슴속 깊이 공포 불안 분노 같은 트라우마가 남았다. 다행인 것은 내전이 끝난 뒤 보복 대신 화해와 치유의 길을 찾아 나섰다는 점이다. 국가적 비극을 통합의 기회로 전환시킨 것이다.

갈등은 어디서나 발생한다. 사랑하는 연인이나 가족 간에도, 신앙 공동체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지, 누가 나쁜 사람인지 찾아내려 한다. 시시비비만 따지다 파국으로 치닫곤 한다. ‘미나리’의 주인공들도 갈등을 겪다 큰 위기를 맞이하지만, 파국으로 가지 않는다. 위기는 서로를 단단히 이어주고 깊이 이해하는 기회가 된다. 가족을 넘어 국가와 지구촌 차원에서 맞이한 코로나19 위기도 공동체를 돌아보며 치유와 회복으로 나아가는 기회일 수 있다.

기독인은 화해자 중재자의 역할을 요청받는다. 말씀 훈련과 신앙 공동체 생활을 제대로 했다면 그럴 만한 덕목과 자질은 있다. 초갈등 상황에서 맞이한 코로나19 위기도 화해와 치유, 회복의 기회로 반전시킬 수 있다. 한국교회와 신자들의 역할을 기대한다.

송세영 종교부장 sysoh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