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드는 생각, 나는 사기꾼이야!

입력 2021-03-11 19:28
‘나는 왜 나를 가짜라고 생각할까’의 저자 산디 만은 가면증후군으로도 불리는 ‘사기꾼증후군(Imposter Syndrome)’을 호소하는 이들이 점차 늘고 있다고 설명한다. ‘질환이 아닌 경험’으로 봐야할 정도로 흔해졌다는 설명도 덧붙인다. 저자는 그 배경으로 ‘민낯’을 숨기고 인생의 하이라이트만 드러내는 소셜미디어, 경쟁의 심화, 칭찬 세례에 익숙한 ‘밀레니얼 세대’의 등장 등을 거론한다. 게티이미지뱅크

가면증후군으로도 알려진 ‘사기꾼증후군(Imposter Syndrome)’은 여배우들에 의해 유명세를 탄 적이 여러 번 있다. 해리 포터 시리즈로 이름을 알린 엠마 왓슨은 2013년 자신이 “사기꾼증후군을 앓고 있다”고 언론에 고백했다. 왓슨은 “내가 잘 하려고 할수록 적합하지 않다는 감정만 더 커진다”며 “금방이라도 누군가 내가 완전한 사기꾼이라는 것을 알아채 내가 이룬 성취에 대해 그럴 만한 자격이 없다고 할 것 같다”고 말했다.

2015년에는 나탈리 포트만이 하버드대 졸업식 축사에서 과거 자신이 하버드대에 어울리지 않는 존재라 생각한 적이 있다고 털어놨다. 포트만은 당시 “1999년 하버드에 입학했을 때 나는 여기에 속할 만큼 충분히 똑똑하지 않다고, 뭔가 실수가 있었던 것 같다고 느꼈다”며 “내가 (배우라) 유명했기 때문에 입학한 거라고, 남들도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고 떠올렸다.

너무 흔해 질환도 못 되는

두 배우의 언급에서 알 수 있듯 사기꾼증후군은 “자신은 남들이 생각하는 만큼 뛰어나지 않으며 따라서 자신이 주변을 속이며 산다고 믿는 불안 심리”를 일컫는다. 책 ‘나는 왜 나를 가짜라고 생각할까’를 보면 증상은 두 배우에게 한정되지 않는다. “지금도 내 재능이 미천하고 결국은 세상이 그걸 눈치 챌 거란 생각이 들어요.”(미셸 파이퍼), “때로 촬영장에서 이런 생각이 들어요. 도저히 못 하겠어. 나는 사기꾼이야.”(케이트 윈슬렛), “대체 무슨 생각들이지? 이 역할을 나한테 준다고? 내가 가짜라는 걸 정말 모르는 걸까?”(르네 젤위거).

이쯤 되면 다른 인생을 연기하는 배우, 그 중 여배우에게 발현되는 게 아닐까 싶지만 그렇진 않다. 배우 톰 행크스 역시 “언제쯤 사람들이 내가 사기꾼이라는 걸 눈치 채고 내 모든 것을 압수할까?”라고 했고, 페이스북 최고운영책임자(COO)인 셰릴 샌드버그는 “불쑥불쑥 내가 사기꾼처럼 느껴지는 날들이 있어요. 내 자리가 내가 있을 곳이 맞는지 확신이 없어요”라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유명인이나 성공한 이들이 으레 하는 겸양에 과도한 의미 부여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박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왜…’의 저자이자 영국 센트럴랭커셔 대학 부교수인 산디 만은 임상 경험을 통해 “사기꾼증후군이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다”고 말한다. ‘사기꾼’들은 업무 등의 영역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다수이지만 부모 노릇을 제대로 못한다는 부모들, 수많은 지인들에도 불구하고 인기가 없다고 느끼는 사람, 선행을 하면서도 선행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 10대 청소년 등 그 유형과 연령도 제각각이다.

사기꾼증후군이라는 용어는 1978년 임상심리학자인 폴린 R.클랜스와 수잰 A.임스가 쓴 논문 ‘성공한 여성들에게 나타나는 사기꾼 현상:그 정신역학과 치료법’에 첫 등장한다. 이들은 사기꾼증후군의 특징으로 1)남들이 자신의 능력이나 기량을 과대평가한다는 믿음 2)자신이 가짜로 들통 날 것이라는 공포 3)성공의 원인을 운이나 노력 같은 외부 요인으로 넘기는 경향을 꼽았다. 논문에 보이듯 첫 연구대상은 여성이었으나 차츰 성별에 관계없이 증상이 나타나고, 너무 흔해져 “질환이 아닌 경험”으로 봐야 한다는 논의가 이뤄질 정도다. 70% 이상이 평생에 한 번 이상 경험한다는 연구도 있다.

책은 ‘완벽주의자형’을 비롯한 기본적인 ‘사기꾼’의 종류, 성별에 따른 ‘사기꾼’의 발현 증상, 최근에 그 수가 부쩍 늘어난 ‘나쁜 부모’ 등 보다 세부적인 ‘사기꾼’들로 논의를 이어간다. 세부적으로 차이가 있지만 이들은 모두 스스로에게 과도하게 엄격하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성과를 낸 경우 자신을 인정하기보다 ‘내가 한 일은 사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어’라거나 성공의 요건을 지나치게 엄격하게 판단하는 등 스스로를 깎아내리기 바쁘다.

인생의 하이라이트만 비추는 SNS

‘사기꾼증후군’은 자존감·자기확신·자신감 결핍에 뿌리를 둔다. 저자는 이러한 자존감 결핍의 배경으로 ‘못마땅해 하는 부모나 윗사람’ ‘과잉통제 부모’ ‘따돌림의 경험’ ‘성적 부진’ ‘사회적 비교’ ‘외모’ 등을 제시한다. 이중 소셜미디어 및 밀레니얼 세대(1980년대 초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태어난 세대)의 등장 같은 10~20년 사이 사회적 변화는 최근 사기꾼증후군의 창궐과 밀접히 연관된다.

남과의 비교 욕구를 가진 인간에게 소셜미디어는 이전과 차원이 다른 비교의 장을 열어젖혔다. 과거 유명인사와 왕족 등의 화려한 삶에서 멀리 떨어져있던 대중은 이전에 만날 일도 없었던 사람들의 일상까지 시도 때도 없이 살펴볼 수 있게 됐다. 그 결과 타인이 올린 인생의 ‘하이라이트’를 자신의 평범한 일상과 저울질한다. “모두가 그렇게 특별할 수는 없다. 특히 시종일관 특별한 사람은 아주 드물다. 우리는 그저 남들의 특별함을 넋 놓고 보면서 자신의 평범함을 절감한다.”

특히 ‘디지털 네이티브’인 오늘날 청소년에겐 소셜미디어와 인터넷의 영향은 막대하다. 가상세계 등장 이전을 기억하는 세대가 ‘보이는 것이 모두 완벽하지 않다’는 분별력을 가졌다면 청소년들은 다수가 자신의 가치를 ‘좋아요’나 팔로어 수로 판단한다고 책은 설명한다. 이는 소셜미디어를 익숙하게 쓰면서 부모가 된 밀레니얼 세대도 마찬가지다. 소셜미디어가 중계하는 ‘좋은 가족 경쟁’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자신과 아이를 계속 채찍질한다.

부모로부터 아낌없는 칭찬을 받은 밀레니얼 세대의 문화가 사기꾼증후군을 부채질한다는 분석도 흥미롭다 ‘꼴찌에게도 메달을 주는’ 문화에서 성장한 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진짜 성공’을 더욱 갈망한다. “밀레니얼 세대는 사기꾼증후군과 더불어 성장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밀레니얼 세대는 자기 입증 부담을 가장 많이 느끼는 세대가 됐다.”

책에는 ‘사기꾼증후군’ 자가 테스트와 대처요령도 담겨있다. 개별적인 대처요령들이 나뉘어 있지만 이를 관통하는 큰 줄기는 문제의 수용과 균형 잡기다. 먼저 자신을 ‘사기꾼’으로 느끼는 것이 때론 자신을 다잡고 최선을 이끌어내는 자극이 된다고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동시에 자기회의를 어느 정도 걷어내고 적절한 균형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앞의 나탈리 포트만이 했던 하버드대 졸업식 축사와도 연결되는 이야기다. 포트만은 자신의 부족했던 때를 떠올린 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때로는 여러분들의 불확실함과 미숙함이 다른 사람의 기대와 기준, 가치를 받아들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 미숙함이 그 자체로 특별한 이유들로 규정된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습니다.”

김현길 기자 h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