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땅은 식물을 내라!

입력 2021-03-11 03:01

모두에게 그렇겠지만, 코로나19는 나의 일상을 많이 바꿔놓았다. 가장 특별하고 긍정적인 변화는 ‘산책’이었다. 바로 옆에 산책하기 매우 좋은 수목원이 있지만, 갈 일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매일 일정 시간 걷게 됐다.

작년 여름, 가볍게 나갔던 산책길에서 억수 같은 비를 만났다. 멀리서 천둥소리가 들려오고 눈앞에서 번개가 번쩍이는 엄청난 비였다. 몽땅 젖은 몸을 바삐 움직이며 비로부터 도망치고 있을 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꼼짝없이 비를 맞고 있는, 한 치도 움직일 수 없이 땅에 묶여 있는 나무와 꽃들이었다.

‘동물과 식물의 차이는 이런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동물은 어디든 움직일 수 있지만, 식물은 그렇지 못하다는 새로울 것 없는 진리가 이상하게 마음을 ‘쿵’ 하게 했다. 도망갈 수 없는 식물들은 고스란히 비를 맞고 천둥과 번개를 견뎌야 한다니…. 다음 날, 산책길에서 그 나무와 꽃들을 봤을 때, 마음이 다시 ‘쿵’했다. ‘살아있었구나’라는 생각에 마음이 울컥했다. 그 비를 맞고 어떻게 살았지. 내가 어제 그렇게 내내 서서 밤새도록 그 무서운 비를 맞았더라면, 오늘 ‘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 후 나의 식물예찬이 시작됐다. 움직이지 못한 채, 모든 불가항력적 변화를 묵묵히 견뎌내며 생명을 유지하는 식물은 피하고 도망가고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동물보다 얼마나 강한가. 우리는 식물상태란 말을 죽음과 유사한 의미로 사용한다. 어떤 것이 움직이지는 못하고 무기력하면, ‘식물○○’이라 부르곤 한다. 그 말에 절대 동의할 수 없다. 움직이지 못하고 죽은 것 같지만, 스스로를 방어할 어떤 장비도 갖추지 못했지만, 식물은 살아남는다. 오랜 시간 버텨온 나무가 쓰러지고 가냘픈 줄기가 꺾이기도 한다. 그래도 비가 오고 눈이 내리고 햇볕이 내리쬐고 언 땅이 녹은 뒤에, 식물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마른 목을 축이고 언 몸을 녹이며 젖은 몸에서 생명을 내뿜는다.

식물의 생명력은 ‘땅은 식물을 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상기시킨다. 뭍이 드러나게 하신 후에, 하나님은 그 땅에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고 명하신다.(창 1:11) 6일간의 창조 이야기를 두 부분으로 나누면, 첫 번째 3일은 공간 창조(빛과 어둠, 궁창과 하늘, 땅과 식물)에 해당하며 나머지 3일은 그 공간 안에 있는 것들의 창조(해와 달과 별, 하늘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 땅의 생물과 인간)라 할 수 있다. 이런 대비라면, 식물은 세상을 구성하는 근간으로 근본적 공간을 형성한다. 움직이지 못하는 그 식물의 생명으로 구획된 공간 안에서, 온갖 생명을 가진 것들이 움직이며 살아간다. 움직일 수 없어서 무력한 것이 아니다. 움직이지 않고 생명을 내뿜는 힘, 그것이 식물이다. 세 번째 날, 하나님이 땅을 만드시고 ‘보기에 좋았다’ 하시고 또 땅이 식물을 내자 ‘보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신 것은 이 때문 아닐까.

식물들이 구획해준 생명의 공간을 매일 걸으며 피하지 않고 견디는 식물들의 묵묵함과 강인함을 돌아본다. 도망치기에 바빴던, 숨을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던, 방향을 잃어도 움직일 수 있어 좋았던 시간들이 스쳐간다. 사순절의 의미가 움직이지 않고 견뎌내는 식물과 겹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순절은 고난 가운데서 십자가를 지켰던, 고난 앞에서 도망가지 않았던, 죽음 앞에서도 꼼짝 않고 생명을 뿜어낸 예수님을 기억하는 기간이 아닌가. 너무 빨리 달아나고 끈질기리만치 꼭꼭 숨으면서, 그 움직임들을 자랑했던 ‘나’와 같은 동물적 인간들이 사순절을 통해 식물적 인내와 견딤으로 하나님이 ‘보기에 좋은’ 믿음의 길을 가면 좋겠다.

김호경 서울장로회신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