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초부터 기업들이 본격적으로 도입한 재택근무가 이제 방역을 넘어 일상이 되고 있다. 국내 기업 중 절반가량은 재택근무를 도입했고, 코로나19 상황 후에도 재택근무를 지속하겠다는 기업도 많다. 다만 재택근무 준비 기간이 워낙 짧았고 명확한 기준이나 규정도 없어 노사(勞使) 간 마찰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이 한계로 지적된다.
12일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해 8월 기업 인사 담당자 400명, 근로자 878명을 대상으로 ‘재택근무 활용 실태’를 조사한 결과 전체의 48.8%가 재택근무를 도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 직원을 대상으로 재택근무를 하는 기업은 46.7%였고, 10명 중 9명은 코로나19로 재택근무를 처음 접했다. 1주일에 1~3일을 재택근무로 활용하는 비중이 가장 컸다. 또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은 지난해 5인 이상 사업체 종사자 가운데 38.8%가 재택근무를 활용 중이라고 밝혔다. 2018년(19.2%)과 비교하면 배 이상 늘어난 수치다.
코로나19 확산 초기에 대기업을 중심으로 도입된 재택근무는 이제 기업 규모와 관계 없이 빠르게 확산하는 추세다. 고용부 조사 결과에 따르면 10~29인 기업 43.9%가 재택근무를 도입했고 30~99인 기업은 42.7%, 100~299인 기업은 54.0%, 300인 이상 기업은 51.5%가 재택근무를 했다. 업종별로는 금융·보험업과 예술·스포츠 및 여가 관련 서비스업이 66.7%로 가장 많았고, 교육서비스업(62.5%)과 정보통신업(61.5%)이 뒤를 이었다.
기업들이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자율적으로 도입한 재택근무는 노동 현장에서 주요 업무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 코로나19 상황이 끝나도 재택근무를 계속하겠다는 응답은 51.8%로 나타났다. 66.7%는 재택근무로 오히려 업무 효율이 높아졌다고 평가했다. 재택근무의 긍정 효과로는 감염병 위기 대처 능력 강화(71.8%), 근로자 직무 만족도 증가(58.5%), 업무 효율성 증가(23.1%) 등이 꼽혔다.
해외에서는 재택근무를 상시화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구글은 재택근무 기간이 종료된 이후 ‘유연근무 주’를 도입할 계획이다. 페이스북은 5~10년 이내에 전 직원의 50%가 원격근무를 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독일에서는 1년에 최소 24일은 재택근무를 하도록 의무화하는 법안 발의가 추진되고 있다. 최근 국내에서도 재택근무를 이유로 해고하거나 임금을 줄이면 처벌하는 법안이 발의됐다.
아직은 풀어야 할 숙제도 많다. 지난해 초 기업들이 별도 준비 없이 성급하게 재택근무를 도입하다 보니 부작용이 적지 않았다. 근무 여부에 대한 사소한 신뢰 문제부터 연장근로수당, 위치추적, 업무상 재해 등 종류도 다양하다.
고용부 조사에서는 재택근무 시행상 어려움으로 의사소통 곤란(62.6%), 재택근무 곤란 직무와의 형평성(44.1%), 기업 정보 유출 우려(44.1%), 성과관리 및 평가의 어려움(40.0%), 재택근무를 위한 인프라 비용 부담(9.0%) 등이 지목됐다.
플레로게임즈에서는 재택근무 시 쉬는시간과 업무시간이 잘 구분되지 않고, 연장근무를 해도 업무시간으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불만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피닉스전자는 초기비용 부담으로 성과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IT 솔루션이 없어 애를 먹었다. 울산항만공사에서는 제반 규정이 마련돼 있지 않아 직원들이 연차휴가를 사용하고 재택근무를 한 적도 있다. 한국씨아이엠은 재택하는 직원들이 소속감을 잊지 않도록 ‘셀카 올리기 이벤트’까지 했다.
재택근무의 연장·야간 근로수당도 쟁점이다. 고용부에 따르면 사업주의 지시로 연장·야간 근로를 하면 가산수당을 추가로 지급해야 한다. 다만 사업주와 합의 없이 근로자가 자발적으로 연장근로를 하면 수당을 받기 어렵다.
업무 개시 30분 전 전화·메신저로 재택근무자에게 단순한 업무 지시를 하는 것만으로는 시업(始業)시각이 당겨진 것으로 해석되지 않는다. 사업주는 근태관리 목적이라도 근로자 동의 없이 위치 정보를 수집할 수 없다. 또 재택근무는 자택에서 근무해야 하지만 카페 등 다른 장소를 추가하는 것도 가능하다. 단체협약·취업규칙에서 회사가 근로자에게 식비·교통비를 지급하게 돼 있는 경우 실제 지출 여부와 관계 없이 동일하게 지급해야 한다.
산업재해와 관련된 노사 갈등도 문제다. 재택근무에 따른 업무와 관련해 발생한 부상·질병은 업무상 재해가 인정된다. 고용부는 “업무 수행 중 의자에서 일어나다 골절상을 입은 경우도 해당된다”고 설명했다. 용변 등 생리적 행위를 하던 중 발생한 사고도 업무상 재해로 포함된다. 다만 업무와 무관한 근로자의 사적 행위로 인한 부상·질병은 업무상 재해로 인정되지 않는다. 재택 중 인근 편의점에 식료품을 사러 가다 넘어져 상처를 입거나 육아를 하다가 다친 경우 등이다.
재택근무 관련 제도를 활용하는 것도 노사 분쟁을 줄이는 방법이다. 유연근무제 간접노무비 지원이 대표적이다. 재택근무 등 유연근무제를 활용한 사업주에게 정부가 간접노무비를 주는 제도다. 근로자 1인당 연 최대 520만원까지 받을 수 있다. 올해 본예산은 원래 236억원이었는데 기금 변경으로 450억원까지 늘었다. 재택·원격근무 인프라 구축을 지원받을 수도 있다. 업무용 소프트웨어 등 정보 시스템, 정보유출 방지용 보안 시스템, 재택근무자의 인터넷 사용료 등이 지원 대상이다.
중소벤처기업부는 대면 서비스 도입·활용 등에 사용할 수 있는 바우처를 최대 400만원까지 지원한다. 사업주가 근로시간을 단축한 근로자의 임금 감소액 보전금, 간접노무비, 대체인력 지원금 등을 1년간 지원받는 ‘워라밸 일자리 장려금 제도’도 있다. 고용부 관계자는 “재택근무가 원활히 작동하려면 IT 인프라를 비롯해 노사 신뢰, 절차와 규정이 정립돼야 할 것”이라며 “체계적인 재택근무 프로세스를 마련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세종=최재필 기자 jpcho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