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은 패션이다] 출연자를 더 돋보이게하는 곰삭은 김치같은 매력

입력 2021-03-13 04:06
1955년 데뷔한 송해는 한국 대중문화의 산증인이다. 2016년 송해의 90세를 맞이해 열린 헌정공연을 앞두고 촬영한 것이다. 뉴시스

‘그게 없어진 걸 안 것은 버스나 전차의 차창을 통해서였을 것이다. 나는 몸을 꼬고 고개가 아프게 뒤돌아보면서 비 내리는 흑백화면 속의 장 마레와 샤를르 보와이에를 안타깝게 배웅했었다.’(박완서 소설 ‘그 남자네 집’ 중에서) 없어진 게 뭘까.

앞뒤 문맥을 찾아서 읽으면 쉬운데 그 정도 수고라면 내가 대신할 참이다. 정답은 바로 앞 문장에 있었다. ‘그 길가에 내가 단골로 다니던 동도극장이 없어진 것도 오래전이다.’

지도 위에서 사라져도 기억 속에선 지금도 영화를 상영하는 곳. 나중에 안 사실인데 해방 후 서울에 세워진 첫 극장이 동도극장(1947-1982)이란다. 원로배우 이순재 선생이 동도극장에서 같은 영화를 네 번이나 보았다는 인터뷰도 읽었다. 참고로 그 영화 제목은 ‘심야의 탈출’(Odd Man Out)이다. 어둠 속에서 출구(Exit)를 볼 때면 이 제목이 떠오른다. 안쪽에선 흥분상태지만(Exciting) 밖에선 무너지는 소리로 심란해서다.

이젠 극장도 허물어지고 시장과 학교 그리고 늙은 소년의 추억만 남았다. 내가 자란 곳은 돈암시장 126호 북청상회였다. 나를 키워준 고모님은 함경도 북청 출신이었다. 학교를 다니신 적은 없지만 자기 주도 학습의 선두주자였다. 나는 시장과 극장을 오가며 미나리처럼 컸다. 생글생글 웃으니 시장의 귀염둥이였고 상인들은 나를 동도극장으로 자주 데려갔다. 신상옥 감독의 영화 ‘쌀’도 기억나는데 아마도 쌀집 누나와 함께 봤을 가능성이 크다.

옆집 단골 중에 유명한 연예인 가족이 있었다. 후라이보이라는 예명을 가진 곽규석씨다. 지금 표기로 하면 플라이보이(Fly boy)인데 공군군악대 출신임을 내세운 애칭이었다. ‘쇼쇼쇼’(TBC)의 초대MC였고 무려 12년(1964-1976) 동안 진행을 맡았다. 영화 ‘미나리’에서 할머니(윤여정)가 이민 간 딸(한예리) 집에서 함께 보는 한국 TV 화면에도 그가 살짝 얼굴을 비친다. 이 분이 소개하는 노래가 영화에선 딸 부부를 맺어준 고리로 등장하는데 그 노래 제목이 ‘사랑해’다.

내가 사랑한 모교는 돈암초등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동급생 중에는 연예인 아들도 있었다. 당대를 풍미한 구봉서 선생의 장남이다. 같은 반은 아니었지만 명회는 교사와 전교생이 아는 유명인이었다. 그땐 말도 못 붙였는데 내가 나중에 PD가 된 후에는 자연스럽게 친구가 됐다. 참고로 구선생과 곽선생은 ‘형님 먼저 아우 먼저’로 유명한 라면 광고의 첫 모델이다.

내가 라면을 만든다면 상품명을 ‘내가 너라면’이라고 짓고 싶다. 예능, 특히 코미디의 핵심은 공감인데 ‘내가 출연자라면, 내가 시청자라면’ 이 두 마음이 없으면 PD 노릇하기가 쉽지 않다. 오늘 탐구하는 송해 선생은 공감의 화신이다. 출생순서로 보면 앞서 말한 두 분 사이에 놓인다. 어른들의 지혜 중에 ‘중간만 가라’는 말이 있는데 아마도 중간은 앞뒤가 사라진 후에도 남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리라. 우리말에는 망(望) 자로 끝나는 말이 많은데 PD는 무엇보다 가망을 보는 사람이다. 가망은 희망의 형제인데 특별히 가능성, 잠재력 있는 꿈이라서 그런 이름을 붙인 듯하다.

2010년 KBS ‘국민과 함께 딩동댕 30년’ 특집 방송을 진행하는 모습. KBS 제공

송해는 선망, 원망과는 거리를 두고 살았다. 연예가에선 나이순서가 아니라 인기순위로 착석하는데 내가 방송사에 입사할 때만 해도 송해는 중간에서 약간 뒷줄에 있었다. 앞줄엔 구봉서, 배삼룡, 서영춘, 이주일 씨가 앉았다. 지금 빈자리엔 누가 앉아있는가. 송해는 예명을 잘 지었다. 송(Song)과 해(海)가 만났다. 하모니와 바다. 넓이로만 치면 이미 태평양이다.

내가 교편을 잡은 중학교엔 연예인 학부형이 여럿 있었다. 명배우이자 코미디언 김희갑(1923-1993), ‘회전의자’를 부른 가수 김용만, ‘밤안개’의 가수 현미 등이다. 특히 김희갑 선생의 아들 성주와는 지금도 사제의 정을 나누고 있다. 김선생은 ‘오부자’ ‘와룡선생 상경기’ ‘팔도강산’ 등 무려 75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앞서 언급한 영화 ‘쌀’로 제3회 대종상 남우조연상을 받기도 했다. 명회 아버지(구봉서)와 함께 ‘합죽이·막둥이’콤비로 큰 인기를 누렸다. 송해 역시 콤비로 오래 활동했다. 파트너는 남자로 박시명, 여자로는 이순주였다. 이 중 이순주씨 아들은 내가 근무한 중학교 학생이었다.

예능 MC는 크게 두 부류다. 잘 받아주는 사람과 잘 받아치는 사람. 송해는 전자다. 나는 일찍이 그에게 네 줄짜리 시를 헌정한 바 있다. ‘옹달샘은 옹벽을 쌓고 산다/ 아침에 토끼가 물만 먹고 간다/ 바다는 모두를 받아들여 바다가 됐다/ 물고기와 해녀들이 고맙다고 인사한다.’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는 사람도 있지만 요리된 물고기를 먹는 사람이 더 많다. 예능에 종사하는 사람도 있지만 예능을 즐기는 사람이 더 많은 것과 비슷하다. 예능을 연구하는 방법 역시 여러 가지인데 나는 장르보다 인물을 조명하는 쪽이다. 요리를 연구하는 사람은 요리사가 될 가능성이 크지만 요리사를 주로 연구하다 보면 덤으로 요리의 재료나 요리법도 배우게 된다.

음식에 비기자면 송해는 인스턴트나 기능성이 아니고 김치같이 곰삭은 식품이다. 패션계에도 이런 분이 있다. 영원한 현역 노라노 여사다. 이분과 직접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옷이 보이지 않고 사람이 보이면 그 옷이 가장 좋은 옷이다.” 명품으로 치장하면 사람의 향기보다 돈 냄새가 진동한다. 송해는 자신보다 출연자를 돋보이게 한다. 몇십 년 동안 전국을 돌며 섭취한 특산물은 그에게 주어진 국민상여금이다. 그에겐 국민이 ‘빽’이다.

1972년 방송된 MBC ‘웃으면 복이 와요’에 출연한 송해(왼쪽)와 故구봉서. MBC 제공

33년을 경찰로 보낸 조용연 전 치안감의 책을 읽었는데 제목이 ‘빽 없는 그대에게’다. 밑줄 긋고 싶은 부분이 여럿인데 하나만 고르자면 ‘참으면 복이 와요’다. 송해가 출연한 코미디 ‘웃으면 복이 와요’(MBC)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사람들은 묻는다. 웃을 일이 없는데 어떻게 웃느냐고. 그러나 웃음은 열매가 아니라 씨앗이다. 웃을 일이 생겨서 웃는 게 아니라 먼저 웃으면 웃을 일이 생긴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그인들 살면서 아픔과 슬픔이 없었으랴. 그는 참았고 그는 이겼다. 사실 참는 것도 두 종류다. 이를 악물고 참는 것과 웃으며 참는 것. 그는 인상 팍팍 쓰면서 참지 않고 허허 웃으며 견뎌냈다.

고등학교 수업시간에 영국의 사회학자 스펜서가 한 말을 들었다. “사람은 삶이 두려워 사회를 만들고 죽음이 두려워 종교를 만들었다.” 수업이 지겨워지면서 나는 이런 의문을 품었다. 혹시 사람들은 삶이 지루해 예능을 만든 게 아닐까.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도 나는 이렇게 변주한다. ‘인생은 쓰고 예능은 달다.’ 그러나 염분이건 당분이건 지나치면 질리거나 해롭다.

로또와 산소의 비유도 추가하고 싶다. 로또매점 앞에는 길게 줄을 서 있다. 하지만 로또를 만나기란 어렵다. 산소는 늘 주변에 있어도 사라지기 전까지 존재의 고마움을 모른다. 송해의 웃음은 로또보다 산소에 가깝다. 순한 예능의 전범을 보여준다. 순한 맛이라서 더 오래 간다. 독한 예능은 수명이 짧다. MC는 갈라놓는 게 아니라 이어주고 연결해주는 사람이다. 그런 면에서 착한 진행자는 천국의 입학사정관에게 높은 점수를 받을 가능성이 있다. 만약 국민 MC 유재석에게 이상형을 물으면 누구라고 답할까. 혹시 송해 아닐까.

연애라면 몰라도 삶의 목표를 향해 가는 데 ‘계단 말고 엘리베이터’는 위험하다. 송해는 느릿느릿 걷다 보니 어느덧 정상에 오른 사람이다. 올림픽은 마라톤으로 끝난다.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하면 송해는 지금 결승점을 향해 두 팔을 벌린 채 걸어가는 모습이다. 그가 걸어온 길가에는 풀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은 ‘자세히 보아야 아름답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러운’ 꽃인데 사람들은 풀꽃보다 불꽃을 동경한다. 그러다가 불꽃놀이가 끝나면 집에 갈 걱정을 하고 길가에 쌓인 쓰레기를 나무란다.

주철환 프로듀서 겸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