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 김연수에게서 공을 넘겨받았을 때 그는 이미 전속력으로 경기장 오른쪽 측면을 질주하고 있었다. 정규시간 종료를 채 20초도 남겨놓지 않은 시점, 마지막 동점 기회였다. 달려들던 중국 선수들을 제치고 공을 결승지점에 꽂아놓은 뒤 그는 한참을 일어서지 못했다.
럭비 남자 대표팀 장성민(29)은 아직도 그 순간을 몇 번이고 다시 돌려본다. 그는 “럭비 인생에서 많은 트라이(득점)를 찍어봤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게 그때”라면서 “유튜브 동영상에 나오는 조회수 중 반은 제가 본 거 같다”고 쑥스럽게 웃었다. 중국과 도쿄올림픽 지역예선 준결승을 치른 그때가 2019년 11월 24일, 벌써 1년 4개월이 지났다. 국민일보는 그를 포함한 럭비 대표팀 선수들과 지난 4일까지 인터뷰를 나눴다.
대표팀 주장 박완용(38)은 그 사이 국내 럭비 선수 중 최고 맏형이 됐다. 그는 “저보다 나이가 많던 분들이 지난해 다 은퇴를 했다”고 웃었다. 그 역시 같은 대회 홍콩과의 결승에서 경기 종료 직전 동점을 성공시키며 극적인 드라마의 주인공 역할을 했다. 지금은 일본에 있는 장용흥이 당시 마지막 트라이를 찍어내며 한국 럭비는 역사상 첫 올림픽 진출의 기회를 얻었다.
올림픽 진출이 결정된 뒤 대표팀에서 가장 빠른 윙어 정연식(27)은 2년간의 일본 프로리그 생활을 접고 지난해 5월 귀국했다. 연봉이나 운동 환경 모두 일본이 월등했지만 올림픽을 위해 감수할 각오였다. 프로리그에서 일반적인 15인제 경기를 연습하는 대신 대표팀에서 올림픽용 세븐스(7인제) 훈련을 하기 위해 한국을 오가는 걸 소속팀 감독이 마뜩잖아 했었다. 그러나 그는 귀국한 지 얼마 안돼 올림픽 연기 소식을 들었다.
코로나19 사태 초기만 해도 이렇게 긴 시간이 지날 줄 아무도 몰랐다. 올림픽 연기 직후엔 다들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했다. 준비 시간이 길어진 만큼 조직력을 가다듬어 세계와의 격차를 좁히자는 목표를 세웠다. 그러나 이들이 함께 모인 건 지난 1월부터 지난달까지 진천선수촌에서 진행한 합숙 훈련이 전부다.
축구와 미식축구의 원류인 럭비는 역사가 오랜 스포츠다. 단순히 말해 ‘몸으로 공을 안고 돌진하는’ 경기다. 상대로부터 공을 빼앗아 공격기회를 얻은 뒤 옆과 뒤로 공간을 노려 공을 뿌리고, 몸동작으로 상대를 제쳐 골라인까지 돌파한 끝에 결승점에 공을 찍는 ‘트라이’에 성공해야 득점이 인정된다.
보는 것만으로도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럭비는 주로 구 영연방 국가에서 축구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리고 있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독보적이다. 이들과의 현실적인 격차를 고려할 때 한국이 다시 올림픽 무대를 언제 밟을지 현실적으로 기약할 수 없다.
이들 선수들에겐 시간이 많지 않다. 예선에서 결정적 도움을 준 남아공 출신 찰리 로우 코치가 이달 말 입국하지만 자가격리 기간을 고려하면 실질적으로 ‘완전체’가 되는 건 다음달이 되어서다.
박완용은 “15인제 대회가 전·후반 각 40분에 선수도 2배 이상 많은 데 비해 세븐스 경기는 전·후반 각각 7분에 경기장 규격은 그대로”라면서 “경기가 훨씬 빠르고 격렬하게 전개돼 15인제와 다른 훈련을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한 경기를 치르면 며칠 휴식을 하는 15인제와 달리 7인제는 하루에도 경기를 한꺼번에 몇 개를 소화해야 해 체력적인 준비도 필요하다.
박완용은 당초 아내와 올림픽 뒤 아이를 가지기로 했지만 대회가 미뤄지며 계획을 늦췄다. 아내뿐 아니라 올림픽 진출권을 따내기 두 달 전 눈을 감은 아버지를 위해서도, 맘 졸이며 바라볼 어머니를 위해서도 이번 올림픽은 그의 럭비 인생에서 하이라이트가 되어야 한다. 그는 “제게 이번 대회는 인생에 한 번 오는 기회”라고 말했다.
정연식은 올림픽을 기다리며 상대할 외국 팀들의 경기를 수없이 동영상으로 봤다. 그는 “일본 프로리그를 겪어봤지만 외국인 선수들 말고는 일본 선수들보다 우리 선수들 기량이 더 낫다. 승산은 충분하다”고 말했다. 한국 대표팀은 이미 리우올림픽 4강에 든 일본 대표팀을 아시안게임에서 제압한 경험도 있다.
장성민도 올림픽에서의 목표를 첫 승리 너머로 잡았다. 그는 “언론에는 우리가 1승을 향한다고 얘기하지만 저는 메달권 진입을 목표로 한다”고 말했다. 이어 “신체적으로도 최전성기일 때 스스로의 한계를 끌어내고 싶다. 설사 메달권에 못가더라도 후회 없이 끝내고 싶다”고 말했다.
올림픽 진출이라는 성과에도 한국 럭비는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 당장 대한럭비협회 홈페이지에도 학교 럭비부 폐지를 막아달라는 요청이 올라와 있을 정도다. 기존의 불확실한 국내 진로에 코로나19로 인한 선수 선발의 어려움, 사람들의 무관심 등 여러 악재가 겹쳐있다. 현재도 실업과 대학 선수를 모두 합해 겨우 100명 수준이다.
선수들의 간절함은 이런 위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들은 “이번 올림픽은 한국 럭비의 새 출발점이다. 좋은 성적을 거두면 지원도 늘어날 것이다. 후배들에게도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고 싶다”고 입을 모았다.
조효석 기자 promen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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