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네트워크 앱 ‘클럽하우스’가 화제다.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기존 사용자에게 초대장을 받아 참여할 수 있는 SNS로 사용자들에게 폭발적 인기를 누리고 있다. 어느 방이든 들어가면 스피커로 말하는 사람들과 듣는 사람들로 나뉜다. 스피커로 초대받거나 본인이 의사를 표시해 대화에 참여할 수 있다. 한마디로 영상 없이 목소리로만 대화할 수 있는 파티로 생각하면 된다.
영상이 대세인 시대에 목소리만으로 사람들과 대화하면 답답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실제 목소리만으로 대화하는 데서 오는 편리함이 많다. 일단 방을 개설하는 사람에게 영상편집 기술이 필요하지 않다. 참가자들도 목소리로만 언제 어디서든 참여할 수 있다. 며칠 전 국무총리까지 클럽하우스에 등장했다고 하니 영향력의 범위가 날로 확대되는 듯하다.
클럽하우스는 사람들의 원초적 갈망이 무엇인지 확인시켜줬다. ‘통하고 싶다’는 것이다. 알고리즘이라는 기술은 우리를 어떤 사람으로 규정지어 나와 비슷한 성향과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세계로 나를 밀어 넣는다. 세상이 전부 나와 비슷한 사람들만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보면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게 만든다. 편협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자신의 유튜브 채널 구독자 수가 늘면 힘을 가진다. 그를 응원하고 지지하는 댓글이 많으면 착각하게 된다. 그 사람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고 댓글을 달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아도, 가시적 댓글의 영향력이 훨씬 크다. 관계가 풍성해지는 게 아니라 편만 늘어난다.
클럽하우스에 무수히 개설된 방과 참여자들의 열기를 보며 하나의 가능성을 본다. 그것은 대화를 통해 견고하게 세워졌던 마음의 벽과 세상에 대한 편견의 담장이 낮아지는 것이다. 여러 사람과 대화하는 가운데 생각의 흐름이 뚫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외톨이처럼 골방에서만 지내던 사람이 햇볕이 내리쬐는 마당으로 나와 이웃에게 인사를 건네고, 길가에 무너진 둑을 다시 세우러 함께 가는 풍경을 보는 것이다. 자기 목소리만 옳다고 주장하던 사람이 다른 사람의 지혜와 이치를 헤아리는 마음에 부끄럼을 느끼게 된다. 1년도 안 된 소셜 앱 하나에 기대를 건다는 게 아니다. 그 안에 담긴 만남과 소통을 향한 작은 열망이 본래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주신 선물이라는 얘기다.
대화는 복음의 진리가 드러나는 곳에서 중요한 통로로 사용됐다. 오로지 목표 달성과 성과만을 강조했다면, 성경은 선포와 기적으로만 채워졌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도 수가라 하는 동네에 물을 길으러 왔던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시며 여인이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소개해 주셨다.(요 4) 죽은 나사로의 누이들과 대화하시며 생명과 부활의 능력을 일깨워 주셨다.(요 11) 교회 안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의 할례 문제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의 일하심을 분별하며 새로운 길을 열어가는 지혜의 결단을 내렸다.(행 15)
코로나19와 맞물리며 교회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사회적 신뢰도가 급락한 것은 물론이고, 기존 성도들도 코로나19 기간을 통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마음과 삶의 형편에 직면하게 됐다.
지금이야말로 대화가 필요한 때다. 코로나19 기간의 이야기와 이후 이야기를 함께 나눠야 할 때다. 다들 대화에 목말라 한다. 대화를 막으면 다른 곳에서라도 할 것이다. 대면은 못 해도 대화는 할 수 있다. 클럽하우스의 인기는 괜한 거품이 아니다.
성현 목사(필름포럼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