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 물가·금융에 ‘고용 안정’ 책무까지 짊어지나

입력 2021-03-08 04:04

우리나라 통화정책 컨트롤타워인 한국은행이 앞으로 ‘고용 안정’ 책무까지 감당해야 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한은 설립 목적 및 정책 목표로 기존의 물가 안정과 금융 안정에 더해 고용 안정을 추가하는 내용의 법안이 줄지어 국회에 접수되는 상황이다. 다만 현재 한은이 갖고 있는 정책 수단만으로는 일자리 방어 역할까지 수행하기 어려운 데다 독립성이 보장돼야 할 통화신용정책이 자칫 정치 바람에 휘둘릴 수 있다는 우려도 많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김주영 의원은 지난 2일 한은법 1조 1항의 목적 규정에 고용 안정을 추가하는 내용의 한은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21대 국회 들어 이 같은 취지의 법안이 발의된 것은 벌써 네 번째다. 지난해 11월에는 국민의힘 류성걸 의원이 물가 안정과 고용 안정을 나란히 놓는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여야 모두 한은법 개정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는 셈이다.

한은은 지난달 23일 국회 업무보고에서 “해당 이슈를 심도 있게 검토해 국회 논의에 적극 참여하겠다”고 밝혔다. 한은은 애초 이 사안에 대해 부정적 기류가 강했으나, 최근의 공식 입장은 ‘중립’에 가까워졌다.

한은의 설립 목적은 1950년 한은법 제정 당시에는 물가 안정 하나였다가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고 난 뒤인 2011년 금융 안정 목표가 1조 2항으로 추가됐다. 이후 코로나19를 계기로 다시 한 번 역할 재정립 요구가 거세지고 있는 것이다. 저성장·저물가 등의 경제구조 변화에 코로나19 파장까지 겹치면서 한은도 ‘물가 안정을 통한 지속 가능한 경제성장 추구’라는 과거의 정책 패러다임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는 논리다. 미국 호주 뉴질랜드 등의 중앙은행도 고용 안정을 물가 안정과 함께 주요 통화정책 목표로 명시하고 있다.

고용시장 안정을 위해 한은이 보다 적극적인 통화정책을 써야 한다는 명분에는 여러 전문가들도 공감한다. 문제는 기준금리 결정이라는 현 통화정책 수단만으로는 물가와 금융 안정 동시 달성이 벅찬 실정인데, 고용 부담까지 지라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고 실효성도 떨어진다는 데 있다. 이주열 한은 총재는 지난달 23일 국회에 출석해 “고용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으며 법안 취지에도 충분히 공감한다”면서도 “하지만 막상 고용 안정을 목표로 넣었을 때 통화정책을 잘 운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이 앞서는 것이 사실”이라고 토로했다. 또 “통화정책이 고용에 미치는 효과가 강하지 않다는 우려가 있고, 고용 안정과 금융 안정은 현재 단계에서 상충되기 십상”이라고 언급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한은의 독립성 훼손 위험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7일 “한은의 독립성이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지만, 코로나19 사태로 (정치권에서) 한은에 굉장히 많은 압박과 주문이 들어가고 있다”며 “한은법에 고용 안정을 집어넣는 순간 그 압박 수위가 더 강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지호일 조민아 기자 blue5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