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 유력 후보로 거론되는 영화 ‘미나리’에는 한국 배우 두 명이 나온다. 첫째는 지금까지 여러 시상식에서 26개의 여우조연상 트로피를 들어 올린 윤여정이다. 그리고 그 옆에는 러닝타임 내내 대선배 못지않은 존재감을 뿜는 한예리가 있다. 미국 영화 전문지 ‘콜라이더’는 이런 한예리를 메릴 스트립, 에이미 아담스, 안야 테일러 조이와 함께 오스카 여우주연상 유력 후보로 꼽았다. 23일 온라인으로 만난 한예리는 “‘미나리’로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면서 “영화로 받은 사랑에 보답하는 배우가 되겠다”고 말했다.
한국계 미국인 리 아이작 정(정이삭) 감독의 어릴 적 경험을 담은 ‘미나리’는 1980년대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시골 마을에 정착한 가족을 그렸다. 미국 영화지만 한인 이민 가정 이야기에 한국 배우들이 출연한다는 점에서 국내 관심도 뜨겁다. 다음달 3일 개봉하는 이 작품에서 한예리는 제이콥(스티븐 연)의 아내 모니카를 연기했다. 낯설고 척박한 땅에서 아이들과 가정을 지키려 고군분투하는 모니카는 한예리의 호연에 힘입어 당시를 살았던 모든 어머니의 표상처럼 보인다.
한예리는 이날 “신기하다” “영광이다” 같은 표현을 자주 썼다. 시종일관 잔잔하게 흘러가는 한 가정의 이야기가 이토록 세계를 사로잡을 줄 몰랐다는 뜻이기도 했다. ‘미나리’가 지금까지 세계에서 받은 영화상은 무려 74개다. 한예리는 그 이유로 ‘보편성’을 꼽았다. “외국 기자들까지 ‘미나리’를 보고 내 어릴 적 모습이라고 말하는 게 신기했어요. 영화는 이민자 이야기이면서, 모든 가족의 이야기이기도 해요. 고단함 사이로 빛나는 삶의 아름다움을 포착하고 있죠.”
한예리는 ‘최악의 하루’ ‘춘몽’ 등 독립·예술영화에서 탄탄한 연기력을 선보여 왔다. 드라마 ‘녹두꽃’ 촬영 중 완성되지 않은 ‘미나리’ 1차 시나리오 번역본을 전해 받은 한예리는 궁금함에 정 감독을 만나러 달려갔다. “감독님 유년 시절의 추억들을 들었어요. 그랬더니 제가 잘 알고 있는 여성들이 자연스레 떠올랐어요. 엄마 이모들 할머니…. 모니카는 그 얼굴들을 뭉치고 확장해서 만들었어요.”
한예리는 정 감독 유년기 가족사진과 당시 옷차림 등을 참고해 모니카를 다듬었다. 여기에 깊은 대본 해석력이 도드라졌다.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읜 모니카는 생계를 책임진 엄마 순자(윤여정)에게 연민을 느낄 것 같았어요. 그런데 순자는 씩씩하고 또 친구 같죠. 제이콥을 사랑한 이유도 그에게서 엄마의 모습을 봤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영화와 마찬가지로 촬영 현장의 버팀목도 윤여정이었다. 70대에도 새 현장에 뛰어드는 용기와 어려움을 시크한 유머로 극복하는 윤여정을 보고 한예리는 여러 번 감탄했다. “힘든 상황에서도 선생님은 ‘사는 게 다 이렇지’라며 대사를 읊듯이 풀어내세요. 선생님의 그런 향기가 유수의 감독님들을 매료시키는 것 같아요.”
연이은 수상 낭보는 ‘미나리’ 팀의 단체 대화방에서 늘 공유한다고 한다. 한예리가 부른 한국어 엔딩 OST ‘레인송’이 오스카 음악상과 주제가상 예비후보에 이름을 올린 것도 그중 하나였다. “동양 가수가 후보에 오른 건 처음이래요. 영화에 보탬이 되고 싶어 부른 건데, 정말 큰 일(아카데미 수상)이 일어나면 노래 부르러 가겠습니다. 못하지만요(웃음).”
강경루 기자 r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