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이 호수에서 광풍을 만나니 비로소 예수님을 찾는다. 예수님 앞에서 큰 소리를 내며 도움을 구하는 모습은 전에 없었던 모습이다. 더구나 예수님을 “주여, 주여” 하고 두 번 불렀다는 것은 그만큼 제자들의 사정이 급했음을 말해준다.(24절) 이제야 예수님을 좀 의지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렇다면, 내용의 흐름을 볼 때 예수님은 제자들의 이 부르짖는 모습을 기뻐하셨어야 한다. 당연히 “예수께서 흡족히 여기사”라고 전개가 되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셨다. 풍랑을 잠잠케 한 후에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며 그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셨다.(25절)
왜 그러셨는가. 이것은 본질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만나면 하나님을 찾고 그분 앞에 간절함으로 나아가는 것은 마땅하다. 이 또한 성숙한 신앙인이 가져야 할 바른 자세다. 그러나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아니다. 우리 신앙의 핵심과 본질은 ‘죽음’을 넘어선 신앙이다.
현재의 삶에서 부자가 되고 높은 지위에 올라가고, 무병장수하기를 원하는가. 그것은 다른 종교에서도 말하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이 땅에 있지 않다. 다른 종교에서 결코 약속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부활 신앙’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라는 말씀을 진정으로 믿느냐는 것이다.(요 11:25~26)
우리는 죽음이 끝이 아니다. 죽음은 영원을 여는 문이고 우리가 마땅히 가야 하는 길이며 그 후에는 영생이 있다는 것,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다’고 했는가. 만일 제자들이 그저 “예수님, 풍랑을 잠잠케 해 주세요”라고 했다면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들이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직도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다. 예수님이 나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죽음’을 해결해 주러 오셨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들을 책망하셨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고.
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시는가. 예수님은 이때 이미 아셨다. 여기 이 제자들 모두가 순교하게 될 것을, 그리고 죽음이라는 공포가 그들 앞에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그 짧은 3년 기간에 제자들에게 죽음을 이기는 훈련을 집중하셨다. 그래서 이번 한 번뿐만 아니라 또 한 번의 풍랑을 준비하셔서 죽음이 그들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계속 알려주고 있다.
그들은 그 훈련을 잘 감당했다. 결국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참 성숙한 신앙의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우리 역시 이 진지한 질문 앞에 서야 한다. 내가 지금 믿고 있는 것이 이 땅의 안위인가, 아니면 죽음 후의 안식인가.
지금 겪고 있는 모든 문제와 어려움을 하나님께 구하라. 모든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께서 고쳐 주시고 해결해 주실 것이다. 그러나 이제 성숙한 신앙으로 가기 위해서는 여기에 머물면 안 된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다가올 수 있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단순하다. 그저 입을 열어 우리 예수님께 자신을 의탁하라. 성경은 그것 외에 다른 어떤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말씀을 통하여 내 신앙의 자리를 확인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겸손히 구하라.
성숙으로 가는 그 길목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라. 그때 그 자리에서 우리를 이끄시고 놓지 않으시는 그분의 손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성숙이다.
(미국 버지니아 한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