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자 모닥불 등장… 그린뉴딜 논쟁으로 번진 ‘텍사스 대정전’

입력 2021-02-19 00:07
이상한파 속에 대규모 정전 사태를 맞은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주민들이 재활용센터에서 땔감으로 쓸 목재를 가져가고 있다. AP연합뉴스

미국 전역을 강타한 ‘이상한파’가 텍사스주에서 대규모 정전 사태를 초래한 가운데 보수 진영 인사들이 풍력발전 등 재생에너지 확대 정책이 원인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공화당 소속 그레그 애벗 텍사스 주지사는 텍사스의 에너지 정책 전반에 대한 주의회 차원의 조사를 지시하는 등 자연재해가 정치 쟁점화되고 있다. 기후변화 대응을 둘러싼 공화당과 민주당의 오랜 갈등이 텍사스 정전 사태를 계기로 폭발하는 모습이다.

미 워싱턴포스트(WP)는 17일(현지시간) 사설을 통해 “텍사스주 공화당 리더들이 전력 위기라는 재난의 원인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며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비판했다. 애벗 주지사가 전날 보수논객 숀 헤니티가 진행하는 폭스뉴스 방송에 출연해 “(텍사스 대정전은) 그린 뉴딜이 미국에 얼마나 치명적인 카드가 될 것인지를 보여준다”고 발언한 것을 정면 반박한 것이다.

애벗 주지사는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풍력과 태양광발전 시설은 혹한 속에 멈춰섰고 그것들은 우리 전력망의 10%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며 “이 점이 텍사스를 전력이 부족한 상황으로 내몰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화석연료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이번 사태가 보여줬다”고 강조했다.

WP는 “애벗 주지사의 주장은 텍사스 전력 부족 사태가 대부분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을 포함한 화력발전 시스템의 방한 대비 실패에서 비롯됐다는 주정부 에너지 부서의 설명과 모순된다”고 꼬집었다.

실제 텍사스주의 전력 흐름을 관리하는 전기신뢰성위원회(ERCOT)는 언론 브리핑을 통해 대정전 사태의 원인은 주로 천연가스·석탄·원자력발전소의 고장에 있다고 밝혔다. 이번 한파 속에서 풍력발전 터빈도 일부가 결빙되는 등 고장을 일으켰으나 천연가스와 석탄, 원자력발전소 장비 고장이 정전 사태에 미친 영향과 비교하면 그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텍사스주에서 재생에너지가 겨울철 전체 전력 공급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25% 정도인 것으로 전해졌다. ERCOT에 따르면 이번 정전 사태의 원인에서 재생에너지 발전소 가동 중단이 차지하는 비율은 13%에 불과했다. 전력 부족 사태의 핵심 원인은 화력·원자력발전의 실패에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애벗 주지사의 주장은 기후위기론에 부정적인 보수 진영에 곧바로 반향을 일으켰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측근인 폭스뉴스의 터커 칼슨 앵커는 “텍사스주는 풍력발전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는 정확하지 않은 발언과 함께 조 바이든 행정부의 그린 뉴딜 정책에 대정전의 책임을 전가했다.

댈러스의 한 가정에서 자동차 히터를 이용해 집 난방을 하는 모습. AP연합뉴스

텍사스의 댄 크렌쇼 공화당 하원의원도 트위터를 통해 “텍사스의 기본 전력망이 화석연료 중심으로 짜여 있다는 것에 대해 신께 감사드린다”며 “만약 우리의 송전망이 얼어붙는 풍력 터빈에 더 의존하고 있었다면 정전 사태는 훨씬 심각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전 사태에 대한 불만이 거세지자 애벗 주지사는 주의회에 ERCOT에 대한 청문회를 열어 주 에너지 정책 전반을 조사하라고 촉구했다.

텍사스주 민주당원들은 즉각 반발했다. 이들은 성명을 통해 “우리 주가 대체에너지에 열린 주지사를 갖고 있었다면 위기 상황에서도 효율적으로 전력을 공급할 수 있게끔 하는 비축 에너지를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 진보 정치의 아이콘인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즈 민주당 하원의원도 거들었다. 그는 트위터에 “텍사스가 겪은 인프라 장애는 그야말로 우리가 친환경 그린 뉴딜 정책을 추진하지 않았을 때 발생하는 일”이라고 꼬집었다.

하지만 풍력,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를 중심으로 전력망을 짠다고 문제의 본질이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반론도 여전하다. 풍력과 태양광발전이 날씨 변화에 더 취약하다는 것이다.

실제 텍사스 풍력발전 용량은 16GW로 미국 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지만 이번 한파에는 평소 37.5%에 불과한 6GW 정도의 전력밖에 생산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NBC방송은 “전력 공급이 전적으로 재생에너지로 이뤄지는 미래를 준비하는 바이든 행정부에 이번 사태는 경고 신호가 됐다”고 평가했다.

정전 사태가 정쟁화되고 있는 가운데 텍사스 주민들의 피해는 더욱 악화되고 있다. 이날 가디언에 따르면 텍사스주에서는 최대 300만명에 달하는 주민들이 36시간 이상 전력이 끊긴 채 추위에 시달리고 있다. 난방이 불가능해지면서 강추위를 견디기 위해 모닥불을 피우거나 촛불을 켜고 생활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또 정전으로 음식을 요리할 수 없어 과자와 육포, 물로 허기를 달래고 있다. 프로판가스, 벽난로 등을 이용해 난방하려다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사망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