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교사로서 이슬아 작가의 능력은 사랑의 능력에 있다는 말에 공감한다. 타인의 글을 읽고 그 글에 화답하는 일은 생각만큼 쉬운 게 아니다. 유서 깊은 양식에 근거해 기술의 면면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글쓴이의 생각을 읽고 그 마음에 응답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왜 이 글을 썼는지, 덜 쓰거나 더 쓴 것은 무엇인지, 그렇다면 왜 더 쓰거나 덜 쓰지 못했는지…. 글쓰기 교사는 글이라는 ‘진심의 매체’를 통해 타인의 인생과 손잡는 사람이다.
문학 작품을 읽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문학을 배운다는 것이 기술이나 양식에 대한 학습이 아니라 기술이나 양식으로 접근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는 솜털 같은 사실을 알아가는 과정이란 생각이 든다. 문학을 통해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표현의 기술이 아니라 인생의 기술이기 때문일 것이다. 인생의 기술이 있다고 인생을 자동화 기계처럼 ‘틀리지 않고’ 살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틀리지 않고 사는 것보다 더 어려운 건 ‘틀려도 괜찮은’ 삶을 사는 것이다.
재능 있는 아이들에게 “너는 커서 네가 될 거”라고 말하는 장면이 특히 좋았다. 글쓰기를 좋아하게 된 시점을 더듬어 봤다. 내가 비로소 내가 되었을 때였다. 대학교 4학년 국문과 전공 시간. 과제 제출을 위해 쓴 글에서 나는 내 손에 대해 이야기했다. 누군가가 볼 수 있는 글에 대고 콤플렉스를 이야기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 글을 칭찬해 주었던 선생님이 말하자면 내 인생의 글쓰기 교사다. 그때부터 나는 내가 가진 부끄러움의 목록으로부터 조금 자유로워졌다. 교사에게 사랑의 능력이 있다면 학생에게는 자유의 능력이 있다.
가장 훌륭한 사람은 자신이 된 사람이다. 우리는 대체로 글쓰기를 통해 자신과 거짓 없이 만난다. 한 편의 좋은 글에는 상처의 시작과 함께 상처의 끝이 있기 때문이다. 글쓰기 교사는 아니지만 나도 글을 읽고 글에 대한 글을 쓰며 먹고산다. 읽고 쓰는 것이 이번 생에 선택한 내 생존의 수단이 되었고 여기엔 조금도 불만이 없다. 내가 조금 대견하기도 하다. 글쓰기는 내가 존엄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게 해 주는 첫 번째 선생님이다.
이슬아 작가의 ‘부지런한 사랑’에 이어 읽은 책은 철학자 피터 고프리스미스의 ‘아더 마인즈’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나의 문어 선생님’을 보고 문어에 심각하게 빠져 있던 터였다. 신비로운 문어의 세계에 이끌려 문어에 대한 책을 두 권이나 구입했다. ‘아더 마인즈’와 ‘문어의 영혼’이다. ‘문어의 영혼’이 아쿠아리움 속 문어를 관찰하며 쓴 교감 일지라면 ‘아더 마인즈’는 납득할 수 없는 문어의 비밀을 밝히는 탐구 보고서다.
‘아더 마인즈’에서 저자가 갖는 궁금증은 문어의 시간이다. 큰 몸과 큰 두뇌를 가진 문어는 왜 고작해야 2년밖에 살지 못할까. “벌새는 10년을 살고 볼락속 물고기는 200년을 살며 캘리포니아의 소나무는 수천 년을 사는데 문어는 2년을 사는 것일까.” 문어는 커다란 신경계와 짧은 수명이라는 “희귀한 조합”을 갖고 있는 두족류 생명체다. 성급히 진행되는 노화의 과정은 기묘하다 못해 슬프기까지 하다. 저자는 진화론에서 답을 찾는다.
몸 전체가 뉴런인 문어는 다리에 있는 모든 감각기관으로부터 정보를 수집한다. 외부를 볼 수 있는 피부를 만들고 복잡한 방식으로 색깔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 상상을 초월하는 문어의 신체 기능은 해양 생명체가 갖고 있던 껍데기의 소멸과 함께 생겨났다. 껍데기를 버리고 기동성과 민첩성, 그리고 신경계의 복잡성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단단함이라고는 없는 몸의 약점이 결국 2년이라는 짧은 생의 조건이 되었다. 날카로운 이빨을 지닌 포식자들에게 노출돼 있는 문어는 바쁘게 살고 일찍 죽는 삶으로 진화했다.
문어의 삶을 알아가는 시간은 나와 다른 존재의 삶을 상상하는 일인 동시에 35년 동안의 내 인생을 압축해 보는 경험이기도 했다. 어떤 기억은 2년만 살아도 경험하고 싶었고 어떤 기억은 2년뿐이라면 버리고 싶었다. 인간은 자신의 마음도 모른다. 그걸 규명하지 못해서 인류는 수천 년 동안 글을 쓰며 알고자 했다. 누군가의 말처럼 동물이 말을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다른 존재의 마음, 아더 마인즈는 우리가 존엄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게 해 주는 두 번째 선생님이다.
박혜진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