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26일 서울 명동예술극장에 오르는 ‘파우스트 엔딩’은 코로나19로 침체한 연극계를 되살릴 기대작으로 꼽힌다. 국립극단이 23년 만에 올리는 파우스트 이야기로 최근 신작 가운데 최대 규모 제작비를 투입했다. 지난해 4월 공연 예정이었으나 주연 배우 부상과 코로나19로 아쉽게 미뤄졌다가 이번에 관객과 만나는 ‘파우스트 엔딩’은 연극과 뮤지컬을 넘나드는 이야기꾼 조광화 연출가 겸 극작가의 오랜만의 연극 신작이기도 하다.
특히 이 작품에서 기대를 모으는 부분은 따로 있다. ‘마당놀이의 여왕’ 배우 겸 국악인 김성녀가 200년 가까운 ‘파우스트’ 공연사에서 드문 여성 파우스트로 무대에 오르는 것이다. 그동안 ‘파우스트’에서 악마 메피스토를 여배우가 맡은 경우는 꽤 있었지만 파우스트 박사를 여배우가 연기하는 것은 최근에서야 나타나기 시작했다. 극중 여성들과의 사랑 때문에 파우스트는 남성 배우가 맡았으나 배우의 성별에 관계없이 캐스팅하는 젠더 프리 캐스팅 붐과 함께 ‘파우스트’를 아예 여성으로 재해석한 작품들도 나오고 있다.
16일 전화로 만난 조 연출가는 “오랜 시간 남자였던 파우스트가 또 남성이라고 생각하니 단박에 흥미가 떨어지더라”며 “연극은 소통이고, 그래서 시대에 발맞춰 계속 바뀌어야 한다. 김성녀 선생님을 떠올리는 순간 새로운 ‘파우스트’ 서사가 머릿속에 그려졌다”고 설명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역작 ‘파우스트’는 잘 알려졌듯 파우스트와 메피스토의 대립을 그린다. 학문에 정통했으나 부조리한 세계에 허무주의로 빠진 파우스트에게 메피스토는 열정을 줄 테니 영혼을 넘기라고 속삭인다. 앞서 연극 ‘죽음과 소녀’에서 절규하던 김성녀에게 강한 인상을 받았던 조 연출가의 캐스팅 전화에 김성녀는 그 자리에서 바로 배역을 수락했다고 한다.
조 연출가는 “평생 학문을 한 사람(파우스트)과 평생 무대를 지킨 사람(김성녀)이 오버랩되더라”며 “메피스토 역의 박완규 배우는 원작과는 다른 진중하면서도 유머러스한 악마의 면면을 완숙하게 표현해낸다”고 전했다.
이성의 한계와 극복, 선과 악의 대립, 도덕과 구원의 상관관계 등을 아우르는 원작은 종교·예술·신화적 상상력이 이리저리 얽혀 상당히 난해하다. 조 연출가는 ‘파우스트 김성녀’를 첫머리에 놓고 드라마를 중심으로 원작을 다듬어 나갔다. ‘파우스트 엔딩’에선 파우스트와 그레첸을 이성애적 사랑이 아닌 연민과 교감을 중심으로 펼쳐 보인다. 조 연출가는 “넷플릭스 ‘폴 위의 그녀들’에서 상처받은 여성들이 서로 보듬어주는 걸 보면서 교감이 편견과 혐오, 폭력과 배제가 난무하는 세상의 실마리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속도감과 서사 외적 재미도 대단하다. 방대한 원작을 110분 길이로 압축했다는 조 연출가는 “길이는 짧아도 이야기가 선명해 원작이 전하고자 했던 정신을 다 담은 작품이 됐다”고 자평했다. ‘미친 키스’ 등 전작에서 음악을 적극 활용한 그는 이번에도 노래와 춤을 재밌게 버무렸다. 메피스토가 변신한 들개에서 모티브를 얻은 들개 퍼펫(인형)을 직접 조종하는 배우들의 모습도 이색 볼거리가 될 듯하다.
각색에서 두드러지는 건 파격적인 결말이다. 간척사업을 벌이다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등 파우스트는 여러 잘못에도 불구하고 신에게 구원받는다. 하지만 연극에선 파우스트가 자신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지옥을 택한다. 연극의 제목은 원작의 결말을 경계하는 의미를 담았다. 조 연출가는 “선한 의도 만이 아니라 결과도 중요하다. 무엇이든 맹목적이면 편견이 생겨난다”고 설명했다.
조 연출가는 그동안 작품에서 인식론적 변화를 거듭해왔다. 1992년 신춘문예 희곡 부문 ‘장마’로 당선돼 30년 동안 무대를 누빈 중견으로서 쉽지 않은 변신이다. 이 같은 사실은 연출 데뷔작이자 대표작인 ‘남자충동’을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2017년 ‘남자충동’ 삼연에서 그는 가부장제 풍자라는 주제를 유지하면서도 마초적인 장면을 대폭 수정했다. 조 연출가는 “가부장제를 비꼬는 작품이라 해도 관객이 세상을 보는 방법을 창작자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가 생각하는 코로나19 이후 연극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그는 세간의 회의와는 다르게 “연극은 더 소중한 장르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요즘 비대면 온라인 공연들을 많이 하는데 사람은 본능적으로 타인의 체온을 느끼고 싶어해요. ‘파우스트 엔딩’이 잊고 있던 만남의 소중함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강경루 기자 r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