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상황인 것 같습니다.”
박미희(58) 흥국생명 감독은 16일 인천 계양체육관에서 열린 프로배구 V-리그 IBK기업은행과의 홈경기가 끝난 뒤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어렵게 입을 뗐다. 이날 경기는 이재영·이다영(이상 25) 쌍둥이 자매가 학교폭력(학폭) 사실을 인정하고 구단으로부터 무기한 출전 정지 처분을 받은 뒤 가진 첫 경기였다.
경기 전 박 감독은 학폭 논란에 뒤숭숭한 상황임을 인정했지만, 승점 14점이 남은 정규리그 1위 확정을 위해 주장 김연경 주도로 선수들이 힘을 모으고 있다고 팀 분위기를 전했다. 하지만 최고 선수 두 명을 잃은 흥국생명은 크게 흔들린 끝에 IBK기업은행에 0대 3(21-25 10-25 10-25)으로 완패했다.
우선 세터 김다솔-박혜진과 공격수들의 손발이 맞지 않았다. 토스가 앞으로 쏠려 힘을 실은 공격이 시도되지 못했고, 자주 상대 블로킹에 막혔다. 게다가 수비가 좋은 이재영과 높이가 좋은 이다영이 빠지자 서브 리시브가 흔들렸고 상대 공격에 대한 블로킹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김연경이 12득점(공격성공률 34.28%)으로 분전했지만, 팀의 중추를 잃은 흥국생명에겐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반면 IBK기업은행은 라자레바(29득점) 김주향(13득점) 표승주(10득점) 등 3명이 두 자릿수 득점을 올리는 등 1위 흥국생명을 시종일관 압도한 끝에 2연패를 탈출했다. 이날 34점의 점수 차는 올 시즌 중 최다 득점 차 경기로 기록됐을 정도로 흥국생명은 무력했다. 4연패 수렁에 빠진 1위 흥국생명(승점 50)은 이제 2위 GS칼텍스(승점 45)와 승점 단 5점 차밖에 나지 않는다.
박 감독은 경기 뒤 다시 학폭 논란을 화두로 꺼냈다. 그는 “잘못한 사람은 처벌 받아 마땅하지만, 오늘 나온 다른 선수들이 더 이상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아선 안 된다”며 “이것저것 정말 비상식적인 이야기들까지 계속 나와서 선수들이 많이 힘들다”고 작심 발언을 했다.
박 감독의 말처럼 줄곧 단독 1위를 달려온 흥국생명의 현 상황은 ‘최악’이다. 이재영·다영의 학폭 사실이 지난 10일 온라인상에 폭로된 뒤 약 일주일 간, 최고 인기를 구가하던 두 자매는 국가대표와 리그 경기에 발도 붙이지 못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주축 선수들의 갑작스런 이탈에 한 시즌 간 발 맞췄던 다른 선수들의 동요는 당연하다.
심지어 두 자매는 전력에서 배제된 뒤에도 여전히 팀 분위기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두 자매의 부친은 이날 한 매체를 통해 “딸들이 극단적 선택을 할까 며칠간 잠을 설쳤다. 아이들이 잘못을 시인하고 반성하고 있다”면서도 다시 한번 기회를 줬으면 좋겠다며 또다시 논란을 일으켰다.
쌍둥이가 쏘아 올린 학폭 논란을 수습하기 위해 한국배구연맹(KOVO)도 움직였다. KOVO는 이날 경기에 앞서 비상대책회의를 갖고 앞으로 학폭 가해 전력을 가진 선수를 프로배구 신인 드래프트에서 전면 배제하기로 했다. 이를 숨기고 신인 드래프트에 참여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면 영구 제명돼 선수·지도자로 활동할 수 없다.
학폭 가해자에 대한 징계 규정 신설 방안도 마련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동안 KOVO는 선수인권보호위원회 규정 제10조에 따라 강간 등 성폭력·성추행 사건에만 영구 제명을 내릴 수 있었지만, 학폭 관련 징계 근거를 추가한단 것이다. 다만 징계 근거가 새로 생기는 만큼 이재영·다영 등 기존에 학폭 문제가 폭로된 선수들에 대해선 ‘영구 제명’ 처분이 소급 적용되진 않는다.
인천=이동환 기자, 김철오 기자 hu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