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팡이 미국 뉴욕증권거래소(NYSE) 상장을 선택하면서 차등의결권(복수의결권) 도입 논란에 다시 불을 지폈다. 여야정 모두 차등의결권 도입에 모처럼 의견을 같이하고 있지만, 벤처업계는 추진 법이 ‘실속이 없는 속빈 강정’ 수준이라고 비판하고 있어 논의 향방이 주목된다.
차등의결권은 창업주나 경영자가 경영권에 대한 위협 없이 안정적으로 기업을 운영하도록 하기 위한 제도다. 쿠팡이 지난 12일 미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제출한 상장 신청 서류에 따르면 쿠팡은 김범석 이사회 의장이 보유하는 클래스B 주식에 일반 주식인 클래스A의 29배에 해당하는 차등의결권을 부여했다. 즉, 김 의장이 지분 2%만 갖고 있어도 58%에 해당하는 주주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를 계기로 한국의 차등의결권 도입 진척 상황도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사실 차등의결권은 과거 수차례 추진된 바 있지만, 실제 결실까지 이어지진 못했다. 쟁점도 복잡하고, 다른 법안들 우선순위에 밀린 탓이다. 정부·여당은 2018년부터 관련 법을 개정하겠다고 공언해 왔고, 같은 해 벤처기업 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도 발의됐지만 20대 국회 임기가 끝나면서 자동 폐기됐다. 더불어민주당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총선 공약으로 ‘벤처기업 차등의결권 도입’을 제시했다.
이번에는 이전 논의에서 한발 더 나아갈 수 있을지 관심을 모은다. 이미 국회에는 관련 법안이 다수 계류돼 있는데, 이 중 정부가 지난해 말 제출한 벤처기업 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 개정안을 중심으로 논의가 진전될 가능성이 크다. 권칠승 중소벤처기업부 장관도 16일 “벤처기업이 유니콘으로 성장할 수 있는 생태계 조성에는 (이 법이)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정부가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며 힘을 실었다.
다만 벤처업계에서는 정부안이 지나치게 제약이 많다며 ‘무늬만’ 차등의결권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정부안에 따르면 차등의결권 주식의 존속 기간은 최대 10년으로 제한되고, 3년 유예기간을 뒀지만, 상장 후에는 남은 기간에 상관없이 보통주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정부가 ‘비상장 벤처기업’으로 대상을 한정한 것에 대한 비판도 있다. 국내 약 360만개 중소기업 중 정부 벤처인증을 받은 비상장 업체는 1%(3만9000개) 정도에 그친다. 이 때문에 차등의결권에 관한 규정을 법에 모두 담기보다 대상기업을 확대하고 기업 자율에 맡기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반면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등 시민사회계에서는 비상장 벤처기업에 차등의결권을 도입할 경우 결국 재벌의 사익편취와 세습의결권에 악용될 것이라는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재벌 후계자가 벤처기업을 창업하고, 비상장 벤처기업이 복수의결권 주식을 발행한 뒤 재벌 총수가 보유한 지주회사나 대표회사의 지분을 벤처기업들의 보통주와 교환하는 방식으로 손쉬운 세습이 이뤄질 것이라는 설명이다.
세종=신재희 기자 j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