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희(89) 서울 연동교회 공로권사의 어머니는 애국지사 신의경(1898~1988) 권사다. 이모할머니 박에스더(1877~1910) 선생은 이화여대의료원의 전신인 보구여관에서 인술을 베푼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다. 박 권사도 한국걸스카우트연맹 총재를 지냈다. 집안에 유명인사가 많지만, 박 권사의 가장 큰 자랑은 신앙의 가문을 이룬 것이다.
박 권사를 지난 5일 서울 종로구 혜화동 자택에서 만났다. 무릎 관절이 좋지 않은 걸 제외하면 건강하다는 그는 1933년 이곳에서 태어나 평생 한 차례도 이사 가지 않았다. 그의 집안도 애국심과 신앙열정을 한결같이 지키고 있다.
조모 신마리아 선생이 선교사의 전도로 연동교회에 출석한 게 박 권사 집안 신앙의 출발이었다. 조모는 증조모 정혜신 선생까지 전도했다. 박 권사의 증손까지 7대가 100년이 넘도록 연동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신앙의 대가를 이룬 박 권사는 “새해에 믿는 가정에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길 바란다”면서 “영원토록 이어질 든든한 믿음의 가문을 세우라”고 덕담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에 앞서 부모님의 삶부터 소개했다.
어머니 신 권사는 21세이던 1919년 정신여학교 출신 기독교인들이 주축이 돼 조직한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임원으로 활동했다. 애국부인회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자금을 보내기 위해 만든 항일여성단체로 거액을 송금하며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하지만 한 회원의 배신으로 그해 11월 회원 전체가 일경에 검거됐다. 임원 9명이 재판을 받고 대구형무소로 이송됐는데 신 권사도 21년까지 옥살이를 했다.
출소 후 이화여전을 졸업한 신 권사는 일본 도호쿠제국대학 사학과에 진학했다. 선교사들은 미국 유학을 권했지만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반드시 이긴다”는 말을 남기고 일본행을 택했다. 이 대학에서 유학생 박동길(1897~1983) 인하대 명예교수를 만나 31년 결혼했다. 박 교수는 우리나라 지질학과 광물학의 개척자로 불린다. 35년 두만강변에서 천연 다이아몬드를 발견해 동아시아에는 다이아몬드가 없다는 세계 지질학계의 정설을 뒤집었다.
신 권사도 유학을 마친 뒤 이화여전 교수로 학생을 가르치며 여전도회전국연합회에서 활동했다. 46년에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으로 활동했고 69년에는 기독교여성봉사단체인 한국여성복음봉사단을 조직했다. 봉사단은 지금도 아프리카와 아시아 각지에 교회를 건축하며 현지 교회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 유학을 지원하고 있다. 박 권사도 2014년부터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각각 국민훈장 무궁화장과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고 박 권사도 걸스카우트연맹 활동으로 국민훈장을 받았다. 하지만 세상적 영예에는 큰 가치를 두지 않았다.
박 권사는 “어머니도 ‘무엇보다 신앙생활 열심히 하라’고 늘 말씀하셨다”면서 “우리 집안의 가장 큰 자랑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것이고 그보다 더 자랑스럽고 감사한 건 대를 이어 신앙생활을 하면서 한 교회에 다니는 것”이라고 말했다.
대를 이은 신앙은 박 권사 집안을 사회와 교회에 봉사하는 믿음의 공동체로 키웠다. 그는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후 걸스카우트연맹에서 무보수 이사로 일하면서도 교회 유치부 부장과 달동네였던 창신동교구 구역장으로 봉사했던 경험이 내 신앙을 한 단계 성숙시켰다”면서 “코로나19로 어렵지만, 새해에는 많은 교인이 봉사를 통해 큰 기쁨을 얻길 바란다”고 권했다.
2시간 남짓 이어진 인터뷰를 마치며 박 권사에게 좋아하는 성경 구절을 물었다.
“요즘에는 시편 71편 18절을 주로 묵상해요.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력을 장래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입니다. 제 바람이 이 성경 구절에 다 담겨 있네요.”
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