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하러 나간 시간은 오후 4시. 집에서 20분만 걸어가면 있는 섭지코지에 도착했다. 이곳은 운이 좋다면 강렬한 노을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노을을 기다리며 해변을 걸었다. 하염없이 앞만 보고 걸었다. 그러다 걸음을 멈춘 곳은 해변이 끊긴 지점이었다. 원점으로 돌아가려고 뒤로 돌았더니 시작점에서부터 길게 늘어선 나의 발자국이 보였다. 그게 뭐라고 마음이 아팠다. 과거는 자국을 남기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해변에서는 자국으로 남는다는 사실이 무섭기도 했다. 축축한 날씨 때문인지 유난히 발자국이 깊고 진했다. 한길만을 곧게 걸어왔다고 생각했는데 내 발자국은 삐뚤빼뚤하게 나열돼 있었다. 가슴이 쓰렸다. 이 쓰린 가슴을 안고 집으로 돌아와 시를 썼다. 제주의 모든 것이 낯설고 그것으로부터 영감을 받던 때였다.
곧 제주가 익숙해졌고, 나는 제주를 떠났다. 새로운 영감을 줄 곳을 찾기 시작했다. 낯설고 아름다운 곳이어야만 했다. 그렇게 찾아낸 곳은 유럽의 어느 작은 도시였다. 곧바로 떠날 궁리를 하기 시작했고 이런 나의 계획을 친구에게 털어놓았다. 그러자 친구는 눈을 반짝이며 나를 칭찬했다. 역시 인생은 그렇게 자유롭게 떠돌며 사는 것이 맞는다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나는 한곳에 정착하고 싶다. 떠도는 건 체질에 맞지 않는다. 단지 직업 시인으로서 시를 쓸 때 낯선 곳이 좋기에 짐을 싸고 거처를 옮겨 다니는 것이다. 오히려 인생은 친구처럼 안정적인 평생직장에 다니며 서울 어딘가에 적당한 집을 구해 놓고 사는 게 맞지 않을까 싶다.
친구처럼 사는 인생도 맞고, 나처럼 사는 인생도 맞는다고 마음이 알려준다. 모든 결과가 정답이기에 마음이 편하다. 편안한 이 마음을 그대로 끌고 거처를 마련해둔 유럽으로 떠날 것이다. 벌써부터 그곳에서 분리수거는 어떻게 하는 것인지 몰라 걱정이지만 알아가는 재미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어떻게 살아도 정답인 것이 인생일 테니까 말이다.
이원하 시인